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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최수봉(崔壽鳳)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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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10-30 10:17 조회3,0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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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 ~1921.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 1919년 의열단원으로부터 폭약과 제조기를 입수하여 폭탄 제조    
     1920년 12월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우리 3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가 자유를 빼앗겼으니, 강토의 사용과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사로 나는 투탄한 것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밀양의 학도, 의열단에 들어가다


최수봉 선생은 1894년 경남 밀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향리의 개량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과신지식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선생이 걸었던 배움의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선생은 약산 김원봉과 함께 밀양공보를 다니던 중 단군이 일본 대화족(大和族) 시조의 아우라고 주장한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10년 밀양의 사립 동화(同和)학교에 편입하여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웠고, 1912년 범어사에서 운영하던 부산 명정학교와 1913년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1916년에 들어서는 평안북도 창성군에 있는 사금광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했고, 1919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윤세주, 윤치형과 함께 3월 13일 밀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제에게 수배를 받게 되고,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봉천(오늘날 선양)과 안동(오늘날 단둥)을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였습니다. 이때 최수봉 선생은 길림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동료들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운 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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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1920년, 의열단이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거사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밀반입하려다 일제 경찰에 적발되어 여러 단원들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수봉 선생은 이종암 등과 식민통치의 폭압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 진 것은 1920년 12월 27일 월요일 아침. 밀양경찰서장이 경찰서 직원 19명을 사무실에 모아 놓고 연말연시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던 틈을 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폭탄은 안타깝게도 불발하였고, 일제 경찰의 추격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피체 당하고 말았습니다.


최수봉 선생에 대한 재판은 상고심까지 진행되었으나 일제는 의거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판을 속전속결로 진행해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후 경기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 당했고, 확정판결 한 달 보름 만인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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