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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김원벽(金元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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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11-02 18:03 조회2,1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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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 5. 20 ~ 1928. 04. 09   황해 은율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 주도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2차 만세운동을 주도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대표로 경성에서 열린 두 번의 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3.1만세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던 선생의 삶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다

 

김원벽 선생은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에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외아들로 태어나 서울 소재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 1919년 1월, 경성 시내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선생은 2월 초 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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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대표들이 모여 학생간부회를 개최한 승동교회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퍼지자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되었는데요.

 

만세운동을 추진할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김원벽 선생은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고,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 장소를 정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학생 대표가 중심이 된 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행동하는 지식인,
3.1만세운동의 선봉장이 되다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탑골공원에 모였으나,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습니다.


이에 김원벽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였고,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탄압을 시작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후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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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태화관)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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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남대문역 전경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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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고다 공원에서 3.1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군중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다시 시작된 만세시위에서 김원벽 선생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약 1만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시위 주모자인 선생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이때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선생은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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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 (출처: 독립기념관)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는 등 실패로 돌아갔고, 낙향한 후 1928년 3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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