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1943년, 독립군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 생애 및 활동사항
# 만주와 중국 대륙을 누비며 활약한 광복군
“너는 국가민족을 위하여 盡忠(진충)하여라”
이 말은 공창준 선생이 생을 마감하며 아들 고운기*(본명 : 공진원) 선생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공창준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습니다.
고운기 선생은 의병 출신인 부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 만주로 망명한 한국독립군 모습 (출처: Today happy 블로그)
선생은 한국독립당에서 조직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하였는데요. 1931년 한국독립군 제6중대장으로 중국의 반만항일군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에는 서란현전투에서 일본군 1개 분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 낙양군관학교 터 (출처: 독립기념관)
1933년 고운기 선생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1934년 2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1935년 4월 졸업 이후, 선생은 1937년에 지청천 장군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혁명당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같은 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혁명당은 김구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국민당, 홍진·조소앙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재건)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고운기 선생은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와 유주의 중국청년공작대 (출처: 독립기념관)
일본군이 남경을 공격해 오면서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올랐고, 선생 또한 이들과 함께 이동하여 1938년 11월에 광서성 유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유주에서 고운기 선생은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장을 맡게 되었는데요. 선전활동을 통해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그들을 항일투쟁의 대열로 참여하게 했습니다.
▲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고운기 선생은 제2지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시안으로 이동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아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였습니다.
▲ 한국광복군사열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던 중, 광복군 대원 중 한 명이 일본군에게 체포되는 일이 발생되었고, 이로 인해 비밀조직망과 거점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진 고운기 선생은 대원들과 함께 1941년 겨울 서안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서안의 총사령부가 충칭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고운기 선생 또한 1942년 대원들과 함께 충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충칭에서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광복군의 자율적 활동을 제한하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취소시키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였는데요. 이를 진행하던 중, 병을 얻어 1943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우리 민족을 위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고운기 선생.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국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투쟁했던 선생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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