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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이소응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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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10-16 15:59 조회1,1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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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2. 8. 7 ~ 1930. 3. 25   강원도 춘천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춘천의 병장

오늘날 왜적이 창궐하고 국내의 역적이 여기에 결탁하여 국모를 시해하며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자르고 백성을 구박하여 사지로 몰아넣고 성현의 도를 이 땅에서 모조리 애려고 한다...(중략) 무릇 사방에서 일어난 우리 의병은 국가를 위복수하고 설욕하는 것을 반드시 가장 큰 의리로 삼아야 한다.  "


생애 및 활동사항 
▲ 출생과 성장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 또는 사정거사(思靖居士), 이명(異名)은 직신(直愼)이다. 제14대 선조의 9남 경창군 이주의 9대손이며, 이유영(李惟英)의 증손이며, 이연(李淵)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문포공(文浦公) 이도재(李道栽)이며, 어머니는 고령 신씨이다. 1852년 강원도 춘천도호부 남산 외이작면에서 태어났다.


▲1896년 춘천의병의 봉기

   춘천의병은 전직 관료와 재야 유생을 비롯하여 아전, 구식군인, 포군, 보부상, 농민, 상인 등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춘천의병의 총수를 5~6천 명으로 추산하였던 차상찬은 의병의 다양한 신분 구성에 대해 그 중에는 도포(道袍) 유건(儒巾)에 육자보(六字步)를 걷는 유학자도 있고 물무 작대기에 패랭이를 쓴 부상(負商) 패도 있고 노랑수건에 노망태를 짊어진 산렵 포수(山獵砲手), 뽕나무 활에 목창을 가진 농민 등 각색 인물이 다 있었다.”(丙申兵亂 關東民兵亂秘話)라고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이처럼 춘천의병은 다양한 집단이 충의심과 반개화 의식에 따라 일시 규합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일사분란하게 통솔할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의병은 곧 해산 위기에 처하였고, 급기야 일부 군사들이 관찰부에 난입하여 약탈을 감행하는 등 반군의 조짐까지 나타났다. 이에 의병을 주도한 인사들은 명망과 학식이 높던 선생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았다.

▲춘천의병을 이끈 항일의 선봉장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 항쟁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춘천부에 집결한 지방 유생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과 농민 1,000여 명에 의해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대의 아래 일본을 오랑캐 왜노(倭奴)로 규정하는 등 의병의 명분을 뚜렷이 하는 한편, 전국에 격문을 보내 함께 거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정부에서 춘천부 관찰사 겸 선유사(宣諭使)로 개화파 관료인 조인승(曺寅承)을 임명하여 파견하자 그를 친일파라 하여 참형(斬刑)하였다. 이어 남한 산성의 경기 의병과 연합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으나 관군의 공세로 전력이 약화되자 지평 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제천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들어가 활동하다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춘천 의진은 종형제 이진응(李晋應)과 이경응(李景應)이 지휘하였다. 1930년 음력 3월 25일 향년 79세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춘천의 의병 운동과 유인석 의진의 활동 상황을 기록한 《습재연보》, 《습재선생문집》 등이 있다.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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