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 김규식 | 한 자 | 金奎植 |
이 명 | - | 성 별 | 남 |
생년월일 | 1882.1.15. | 사망년월일 | 1931.3.23. |
본 적 | 경기도 양주 | ||
주 소 | 미상 |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
포상년도 | 1963 | 훈 격 | 독립장 |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김규식’이라는 이름의 운동가 세 분이 별처럼 떠있다. 한 분은 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 국무위원,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이며, 또 한 분은 서로군정서 등 서간도에서 활약했던 김규식이다. 나머지 한 분은 북만주 동만주에서 활약했으며, 북로군정서에서 대대장을 맡아 청산리전투에 직접 참전한 분이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했으며,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한 획을 그었다. 이 후 선생은 대한독립군단 총사령, 고려혁명군 총사령으로 활약했다. |
대한제국 장교로 출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김규식(金奎植, 1882.1.15 ~ 1931.3.23) 선생은 1882년 1월 15일 경기 양주에서 출생했다. 호는 노은(蘆隱), 이명(異名)은 서도(瑞道), 별명은 호장군(虎將軍)이다. 그는 만주로 망명하기 이전에는 대한제국의 장교로서 부위(副尉), 오늘날로 말하면 중위로 근무한 사람이었다. 김규식에 관한 자료가 처음 나오는 것은 1908년 의병운동에 관한 자료에서다. 이로 보아 그는 190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 당하자 의병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요 활동지역은 강원도 철원 일대였다. 그런데 다른 일본측 사료에는 1908년 4월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철원 지방을 횡행’하던 ‘전 육군 참령 김규식(金圭植)’이 인천에서 체포되었다고 나온다. 활동지역이 같은 것으로 보아 양주의 김규식에 관한 설명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한때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의병운동 도중 부상을 당하여 은신하였다는 설명도 있다. 그런 김규식이 1912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이후 1919년까지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만주에서 김규식의 행적을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로군정서에서의 활동이다.
“일본의 적국과 연합하여 전쟁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이동휘 국무총리의 무장투쟁론 지지
1919년 3 . 1운동의 영향을 받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전쟁을 적극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용정과 국자가(局子街)를 중심으로 동만 지역의 한인사회에는 여러 무장단체가 출현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919년 8월 정의단(正義團)에서 명칭을 변경한 군정회(軍政會)이다. 군정회는 왕청현(汪靑縣) 춘명향(春明鄕)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영을 두고 있었는데, 10월에 군정부(軍政部)로 개칭했다가 상해의 통합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대한군정서는 서간도, 곧 남만지방(南滿地方)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구분하기 위해 대한북로군정서(大韓北路軍政署)라고도 불렸다.북로군정서는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가 있던 이동휘(李東輝)의 무장투쟁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즉, 이동휘는 민족(民族)의 자력(自力)으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우리의 주장과 행동을 내세워야 하며, 소련과 일본 또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日本)의 적국(敵國)과 연합(聯合)하여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고, 독립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해야 국제사회로부터 교전단체로 승인 받을 수 있으며, 독립 이후 국가 건설을 우리 민족이 주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 선생이 소속된 북로군정서는 일본군 전위부대 전멸시켜
북로군정서에서 김규식은 처음 중대장으로 근무하였다. 또 이범석(李範奭), 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왕청현 십리평에 건립된 군사간부 양성학교로 김좌진이 소장이었다. 생도들은 주로 대종교의 청년 신도와 왕청현 덕원리(德源里)에 있던 명동학교(明東學校) 학생들이었다. 사관연성소는 학생들에게 군사학과 총검술을 가르쳤고 전투훈련도 실시하였다. 군사학의 교재로 사용된 교재는 <보병조전(步兵操典)>, <축성교범(築城敎範)>, <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 <야외요무령(野外要務令)> 등이었는데, 책의 제목만을 놓고 볼 때 일본군의 교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신흥무관학교에서 사용된 일본군 관련 교재와 양성된 사람들이 만주지역의 여러 독립군에서 활약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적의 현대적 전법을 익혀 적을 격파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연성소는 1920년 9월 졸업식을 거행하여 289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일본군이 만주지역 독립군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독립군들이 백두산 일대로 이동하기 위한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졸업생의 대다수는 교성대(敎成隊)로 편성되어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이동하던 중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만나 접전을 벌였다. 김규식은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다. 1920년 10월 20일을 기해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토벌 작전에 돌입하였는데, 북로군정서군은 이튿날 백운평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기습하여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이 고스란히 전멸하였다. 청산리전투는 25일까지 이어져 독립군이 연전연승 하는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일궈냈다.
중국 왕칭현(汪淸縣)에 세워졌던 북로군정서의 사령부 터
대한독립군단 총사령으로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백두산 일대에 집결하지 않고 북만지방(北滿地方)으로 이동하여 밀산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이 곳에서 서일(徐一)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월경하기로 결정하였다. 20만 명 가량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어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무기도 공급받고 조직도 정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규식은 이때 군대 지휘를 책임지는 총사령에 추대되었다. 김좌진과 이범석 등 대한독립군단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립군은 1921년 3월 이만을 거쳐 자유시(自由市, 알렉세예프스크)에 도착하였다. 독립군은 이 곳에서 노령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빨치산 부대와 독립전쟁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통합하여 1400여 명의 병력을 가진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사할린의용군)을 조직하였다. 김규식은 여기에서 홍범도(洪範道), 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참모부원으로 선발되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은 타국 땅에서 처음 만난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념을 떠나 독립을 위해 함께 활동하려 했던 독립군들의 움직임은 6월에 있었던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사망한 사람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의 와중에서 일어난 참변으로 만주에서 건너간 독립군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김규식이 이후 활동에서 반공(反共)이란 태도를 견지하는 것도 이때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적군으로부터 자유시 참변 겪고 반공주의자로. 만주에서 고려혁명군 총사령으로 활동
자유시 참변을 경험한 김규식이 언제 만주로 돌아왔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자료상 확인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는 1922년 말이다. 그가 목릉현(穆稜縣) 마교하(馬橋河)에서 김좌진, 이범석 등과 활동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 지방관헌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였고, 다시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이동하여 이주한인(移住韓人)을 상대로 의무금 징수활동 등을 벌이며 재기를 모색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주민들의 반발을 받았고, 중국 지방관헌이 체포하려 들자 다시 흩어졌다.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김규식은 동만지역으로 활동거점을 옮겼던 것 같다. 그가 1923년 5월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서 고려혁명군이란 무장단체를 조직할 때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서 총사령으로 활동하였다.
“일본과의 장기항전으로 나간다.” 경작하며 전쟁 대비하는 둔경제 실시
그런데 고려혁명군의 활동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국민개병의 민병제라는 조직방침을 채택하는 한편에서, 둔경제(屯耕制)를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둔경제란 특정한 지역에 거주하며 평소에는 생활에 필요한 생활경제를 스스로의 노동에 의해 확보하면서 군사훈련을 받다가, 기회가 오면 군사활동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무장투쟁 일변도의 활동방식을 지양하고 자력으로 식량을 확보하면서 일본과의 장기항전에 대비하려는 모습인 것이다. 고려혁명군의 활동방식은 노령에서 만주로 돌아온 직후 조선인 거주자들을 상대로 벌인 의무금 징수활동 과정에서 겪은 경험 곧, 반발 내지는 주저하는 모습이 김규식과 동료들의 생각을 바꿔놓는 배경의 하나였다. 또한 조선인 사회에 부담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청산리전투 당시와 달리 장기적인 운동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나온 조치이기도 할 것이다. 독립군을 둘러싼 내외적 상황이 이렇게 바뀌어 감에 따라 만주지역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운동가들이 대응한 조직적인 결과가 3부 곧, 1923년 참의부(參議府), 1924년 정의부(正義府), 그리고 1925년 김규식이 활동한 신민부(新民府)의 결성인 것이다. 김규식의 입장에서 보면 3부의 결성으로 고려혁명군 활동 때부터 ‘조선인만의 자치’에 기초한 활동방향이 더욱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려혁명군이 자치단체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조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신민부(新民府) 단계에 가서야 조직적 실체를 드러낸다.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주류가 무장적 독립운동단체에서 자치적 독립운동단체로 넘어가고 있던 과도기에 남만지역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처럼 동만지역에 나타난 현상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맡으며 학교 세워 교육에 힘 쓰다가 광복 못 보고 돌아가셔
신민부를 비롯한 3부의 군대는 국방기능을 담당하는 조직, 곧 독립전쟁을 위해 국내에 침투하거나 만주의 친일파 등을 처단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조직이었다기보다는 관할 구역 내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사실상 경찰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규식의 경우 2세를 교육하여 장기적인 항일투쟁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연수현(延壽縣) 태평촌(太平村)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면서 1928년 무렵에는 신민부의 활동구역 내에서 창당한 고려국민당의 군사부위원을 맡았다. 1930년 7월경에는 위하현(葦河縣)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서 부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이 확인된다. 한국독립당은 삼본주의(三本主義)를 내걸고 있었는데, 이는 민본정치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을 말한다. 여기서 ‘본(本)’과 ‘인(人)’은 사실상 북만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농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독립당은 군사보다는 자치방면에 활동의 무게를 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독립당은 중앙집행위원회가 북만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을 끌어 모으는 과정에서 지도부를 완성하였는데, 김규식은 이때 4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독립당의 표면적인 활동에서는 한발 물러나 있었으며, 자치와 교육에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무엇보다 2세 교육이 절실함을 깨닫고 옌서우현(延壽縣)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썼다. 이러던 중 그는 1931년 3월경 한족자치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주하현 하동농장에 갔다. 지청천, 신숙 등과 만나 장래 운동을 협의하고 연수현에서 운영하고 있던 학교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직권을 남용하여 하동농장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던 백운봉과 최호 등은 김규식이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김규식 등이 묶고 있던 한족자치연합회 주하지방 집행위원장인 이붕해의 집을 습격했고, 김규식 선생은 이 과정에서 뜻 아니하게 숨을 거뒀다. 우리 나이로 52세, 대한제국의 장교로 출발하여 19년 세월 동안 망명지인 만주에서 청산리 대첩 등을 거치며 민족의 광복을 도모하다가 순국하였다. 선생이 만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40대로서 그의 체력, 열정, 그리고 연륜이 어우러진 때였다. 그의 삶은 독립운동의 큰 흐름과 일치하였다. 1920년대 초반기 군정(軍政) 우위(優位)에 기초한 무장독립전쟁, 1920년대 중반경부터 민정(民政)에 치중한 자치활동과 민족운동 단체의 통일을 위해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활동에 뛰어든 행적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만큼 시대가 독립운동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를 판단하여 적절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했던 40대의 삶을 만주의 하늘 아래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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