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9~1931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조선의 소년 소녀 단 한 사람이라도 빼지 말고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자.
최초로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
● 생애 및 활동사항
◈ 출생과 성장
방정환 선생은 1899년 11월 9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방정환선생 생가터ⓒ독립기념관
방정환 집안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가 태어났을 무렵 그의 집안은 “장사를 크게 하였고 대단히 큰 기와집을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여서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 집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는 그의 술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그러나 아홉 살 때에 별안간에 그 큰 집에서 쫓겨나면서 몰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갑작스럽게 몰락하면서 어린 방정환은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 민족운동에 투신장
방정환의 민족운동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물론이고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천도교가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의 활동은 천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 청년운동
방정환이 최초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1908년 조직된 소년입지회를 통해서였다. 방정환의 일생에서 최초의 조직 활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소년입지회는 일종의 토론회로서 8~9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다.
천도교 청년단체의 변천과 활동 과정에서 각 지역에서 이루어진 강연회의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 3.1운동
한편 경성청년구락부 조직 이후 방정환은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로서 교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방정환은 손병희가 기독교세력과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의 민족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젊은 지식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방정환의 처가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렸다고 한다. 『독립신문』은 1919년 3월 1일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인쇄소 보성사의 사장이던 이종일이 발의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된 지하신문이다.
『독립신문』은 1만장 혹은 1만 5천장이 발행되었는데, 시가행진하는 군중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새벽에 15~16세의 남녀학생들이 다른 신발은 소리가 난다 하여 짚신을 신고 밤을 새워 배달하기도 하였다.
(3) 소년운동
방정환은 1920년 「어린이 노래」(『개벽』3, 1920)를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즉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늙은이’, ‘젊은이’라는 용어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어린이를 비하하거나 낮추어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 부르자는 의미라 생각된다.
방정환의 소년운동은 잡지 『어린이』의 창간 및 그와 관련된 활동,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 활동, 그리고 색동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동화, 동요 등의 창작과 번역, 번안 등의 활동도 있다. 소년운동이 활발해지자 방정환이 이를 보다 확산시키기 위해 소년운동의 지도적인 잡지라 할 수 있는 『어린이』를 1923년 3월 20일 창간하였다. 창간 이후 『어린이』는 독자가 급증하여 1925년 신년호의 경우 발간 7일만에 매진되어 3판까지 발행할 정도였다.이와 같이 3판까지 인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개벽』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고 한다. 방정환이 병으로 눕고 사망하기 전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방정환은 『어린이』의 창간부터 자신의 사망 때까지 『어린이』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 방원환의 삶 정리
첫째, 그는 상인집안의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9살 무렵 가세가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둘째, 그는 시천교 계통의 소년입지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8년에는 경성구락부를 조직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셋째, 경성청년구락부 활동 과정에서 이른바 ‘민족대표’ 등의 어른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이 청년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활동하였다.
넷째, 그는 소춘 김기전과 함께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잡지『어린이』를 창간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소년운동을 주도하였다.
향년 33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정부는 방정환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