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2. 4. 8 ~ 1927. 7. 15
●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
동포로서는 차마 보지 못할 비극을 목도하게 되어 피 많은 그로서는 혈조에 뛰노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밤이면 그들과 목에 피가 마르도록 언쟁을 하였던... 어느 날 안개가 잦은 이른 아침에 낯모를 일본 사람 두세 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는 영영 소식이 잦아지고 말았었답니다.
● 생애 및 활동사항
추송 장덕준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재령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명신중학교에 진학, 1911년에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2년간 일했습니다. 1914년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해 조선문 신문부 주간으로 근무하며 조만식, 김동원, 이덕환 등 평양의 주요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正則) 예비학교에 다니면서 재동경조선인유학생 학우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장덕준 선생은 1920년 민간신문인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했습니다. 선생은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필명 ‘추송’)이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으로 3.1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의 여론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장덕준 선생은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를 위해 1920년 7월말, 특파원으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그들에게 조선의 독립요구를 알리는데 힘썼습니다.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문은 정간되었으나 목슴 건 취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동시에 정간 중이던 이 무렵, 만주의 훈춘(琿瑃) 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청산리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한 ‘경신참변 ’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천여 명을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장덕준은 이 소식을 듣고 현지로 달려거서 취재를 한다 해도 정간 중인 동아일보에 보도할 지면도 없었으며, 자신은 폐병에 걸려 혈담(血痰)까지 토하는 건강상태였다. 그러나 열정적 성격이었던 그는 단신 죽음의 땅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동아일보는 1930년 4월 3일자 추도기사로 그의 최후와 관련한 글을 실었다. “10월 16일에는 함경북도 지방을 시찰하다가 회령에 이르러 일본이 간도에 출병함을 당면하였다. 본사에 통지하고 회령 수비대장과 교섭해 종군기자가 돼 간도로 향하였는데 11월 6일에 무사히 간도에 도착했다는 전보가 있었고 10일에 ?장덕준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와타나베(渡邊) 회령 수비대장의 전보가 도착했다.”고 밝혔다.
장덕준은 간도의 현장에 도착하여 “빨간 피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동아일보, 1925. 8. 29.). 그는 국자가(局子街)에서 얼마 더 들어간 곳에 여관을 정하고 “살풍경이 일어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을 당하고 있는 광경 등 일군의 만행을 취재했다.
11월 6일 간도에 도착한 장덕준 선생은 간도 용정에 이르러 여관으로 돌아와 취재 중이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선생은 일본인 두세 명에 불려 나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선생은 이날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1921년 10월 28일자)은 「장덕준씨 조난논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선생이 일본군에게 암살당했다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습니다.
▲ 장덕준 선생 (출처: 정진석 제공)
의에 대한 용기, 봉공의 정신
장덕준이 실종된 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殉職者)로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이 추도식에 참석했던 김동진(金東進)은 장덕준이 일본군의 종군기자 허가를 얻어가지고 취재를 떠났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고 말하면서 “ 의에 대한 용기, 봉공(奉公)의 정신, 이 두 가지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끼친데 대해서 나는 씨를 과거의 모든 의인보다도 별달리 사모코저 하는 것이다 ”라고 추모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 ‘기자협회 기장(記章)’을 제정하면서 장덕준선생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기리고 본받자는 취지로 기념 메달의 뒷면에 선생의 얼굴을 새겨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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