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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31 18:19 조회4,737회

본문

생몰연도 : 1889 ~ 1976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1977)


공적개요


-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 간행

-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옥중에서<조선독립의 서> 저술

- 1926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경성지회장 취임


공적상세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온양 방씨(溫陽方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쳤다. 유년시절에는 부친으로부터 의인(義人) 및 걸사(乞士)의 기개와 언행을 전해 듣고 나라와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성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왔다. 이런 결단으로 선생은 나라를 구하려고 집을 나왔다가, 우선 ‘인생은 무엇인가’를 풀기 위해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갔다. 백담사에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배웠지만, 문명세계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세계일주를 단행하였다. 세계일주를 시베리아에서 중단한 선생은 설악산 백담사로 돌아왔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불교사상을 탐구한 선생은 일본으로 들어오는 문명세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1908년에는 일본유학을 단행하였다. 6개월의 짧은 유학 생활에서 선생은 불교 근대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확인하였다.

1910년 선생은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 책인『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이 책은 1913년에 발간되었는데 그때부터 선생은 불교의 혁신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 10월 친일승려 이회광(李晦光)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였다. 선생은 이를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이회광 일파를 민족불교 파괴자로 규정하는 한편, 박한영(朴漢永), 진진응(陳震應), 김종래(金鍾來)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1911년 2월 송광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케 하였고, 그 이후 임제종 종무원은 범어사에 두면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서울에 설립하였다. 이때 선생은 관장 직무대리로 임제종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1914년에는 고려대장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축약한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이후 교양서인 『정선강의 채근담』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계몽 잡지인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이와 같은 행보는 선생이 추구하던 불교의 대중화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행보이었다. 즉 암울했던 식민지 무단통치 아래서 민족의 입과 귀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의 희망을 키워갔다.

1919년 선생은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동분서주 하였다. 그 결과 서울 임제종포교당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백용성(해인사 출신) 선사를 민족대표로 서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남 거창까지 내려가 유림의 거두인 곽종석을 만나 유림측도 운동에 동참을 유도하였다.

선생은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즉 선생은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의 사장인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불교계 대표적인 단체(30본사연합회)가 서울에 세운 학교인 중앙학림(동국대 전신) 학생인 신상완(申尙玩)·김법린(金法麟)·백성욱(白性郁)·정병헌(鄭秉憲)·오택언(吳澤彦) 등에게 건네주면서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 및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져온 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고, 선생에게 간단한 식사(式辭)를 부탁하였다. 이에 선생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이후 피체될 경우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민족대표들은 모두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도 의인(義人)답게 태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부 민족대표들은 불안과 절망에 빠져 부끄러운 행보를 보인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강한 경책을 하면서 민족지사로서의 자존심을 갖도록 요구하였다. 나아가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조선독립의 서)」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하였다. 이 논설은 비밀리에 유출되어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1919.11.4)에 수록되었는데,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가슴을 뛰게 한 기념적인 선언서이었다.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나아가 1924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정교(政敎)의 분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한국 불교를 옭아매는 사찰령의 폐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불교인들의 자주적 불교활동을 각성케 하고, 대중불교 노선으로 불교 발전에 매진하자는 이론을 정립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선생의 청년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면이 있어, 『유심』·『조선일보』·『대중공론』등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지금 조선에 학문과 지식을 겸비하고 심리적 수양이 이뤄져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로운 젊은이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전제하고, 전로(前路)에 목표를 설정하여 매진할 수 있는 젊은이를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선생은 당시의 조선청년을 ‘시대적 행운아’라고 지칭하였는데, 이는 “조선 청년의 주위를 싸고 도는 모든 환경이 역경이기 때문에 조선청년은 후세 자손들에게 행복한 유산을 물려주기 위하여 피와 땀을 흘려 현실을 개척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코 회피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될 것”임을 일깨워주는 역설적인 표현이었다.

특히 1927년 2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간회가 창립되자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5월에는 김법린(金法麟)·최범술(崔凡述)·김상호(金尙昊) 등 20여명의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운동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만당은 경상남도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 사찰과 동경에까지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만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족의 자주독립이었는데, 1938년말 일경에게 발각되어 서울, 사천, 진주, 양산 등지에서 6차례의 검거로 말미암아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선생은 불교의 대중화와 민중계몽을 위하여 신문의 발행을 구상하였다. 그래서 당시 운영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인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교계의 유일한 잡지인『불교』지의 발행인으로 1931년에 취임하여 불교 대중화, 식민지불교의 극복, 민족의식 고취 등에 힘을 썼다.

한국문학사에서 선생은 근대적 시인이요,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민족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였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소설로는 「죽음」, 「흑풍(黑風)」(1935, 『조선일보』 연재), 「후회」(1936, 『조선중앙일보』연재하다가 중단), 「철혈미인(鐵血美人)」(1937, 『불교』1·2집에 연재), 「박명(薄命)」(1938, 『조선일보』 연재) 등이 있다.

문학에서 시나 소설의 대상을 자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선생의 시에 있어서 ‘님’은 연구자에 따라 조국, 민족, 불타, 중생 등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있다. 선생의 문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문학과 삶의 행적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요컨대 선생의 시와 소설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당대의 한계로 인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된다.

선생은 「독자에게」라는 시에서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암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또 소설 「흑풍」이 『조선일보』에 연재될 때 작자의 말에서, “변변치 못한 글을 드리는 것은 미안하오나 이 기회에 여러분과 친하게 되는 것은 한없이 즐거운 일입니다. 많은 결점과 단처를 다 둘러보시고 글 속에 숨은 나의 마음씨까지 읽어주신다면 그 이상의 다행히 없겠습니다”라고 마음속의 뜻을 독자가 헤아려 주기를 원했다.

1933년 55세 되던 해 백양사 승려인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자신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는데 여기에서 선생의 민족적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교우관계에 있어서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뜻을 함께한 동지들에 대해서는 매우 깊은 의리를 보여 주었다.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이 1937년 3월 옥중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시고 와 5일장을 치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변절한 친일인사에 대해서는 설령 친분이 깊거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더라도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崔麟)이 변절한 뒤 심우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후 혼자 방문한 최린이 선생이 부재중이자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선생은 부인과 딸에게 호통을 치고, 바로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최후의 발악적인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선생은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이요 독립투사인 선생은 1944년 6월 29일(음력 5월 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하였다. 장례는 전통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였으며,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