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연도 : 1876.02.14 ~ 1908.12.19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1963년)
○공적개요
- 1907년 함평에서 김태원과 함께 거의하여 함평성의 일군을 급습
- 1908년 김태원 전사 후 의병장으로 추대, 호남창의대장으로 활약, 대치 등에서
전해산 의진과 합진하여 일군과 교전
- 1909년 어등산에서 일경의 적탄에 맞아 순국
○공적상세
9세부터 22세까지 유학을 수학하였는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인이었다.
1900년부터 전국 명산대천을 순례하여 산세와 지리를 답사 기록하고 스스로 호를 대천이라 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1907년 12월 초순 광주·함평 등지에서 이원오(李元五)·김동수(金東洙)·양상기(梁相基) 등과 의병을 일으켜, 10일 함평으로 죽봉 김태원(竹峯 金泰元)을 방문 상의하고, 13일 김태원과 함께 거의기병하였다. 조경환은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4일 새벽 함평성내의 일군을 급습하여 적 수십 명을 생포하고 총 18정 및 다수의 화약과 탄환을 노획하였다.
그날밤 학포(鶴浦)에 주둔한 일본의 기병대를 습격하고 함평향교 뒷산으로 퇴각하여 전현감 이용안(李龍安)의 집에서 휴식하도록 하였다. 그후 마치 주점(馬峙 酒店)에서 김박사의진, 이진사의진과 합세하고 자신은 선봉장이 되었다.
17일에 함평의 동촌리(東村里)에 사는 임용여(林龍汝)의 집에서 김박사의 의진이 일군에게 포위 당하여 악전고투하므로 조경환은 의병 약간 명을 인솔하여 응원공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7일 영광군 사창(靈光郡 社倉)을 습격하고 군량을 확보하였다.
1908년 1월 1일 적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고 창평(昌平)의 무동촌(舞童村)에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내습하는 일본헌병대를 맞아 싸워 대장 길전(吉田) 이하 수명을 포살하였다.
11월 장성(長城)의 낭월산(浪月山)에서 일대 격전을 전개하여 무수한 적을 무찔렀으나 아군도 4명의 중상자를 내었다.
3월 7일 영광의 토산(土山)에서 교전하였던 바 적이 예상 밖으로 다수의 증원병을 얻어 대항하므로 아군이 불리하게 되었다. 이에 의려를 불갑사(佛甲寺)로 후퇴시키고 부상병을 치료케하며 무기를 수선하였다. 25일에는 의진을 2대로 나누어 그 일대는 김태원이 영솔하여 천곡(天谷)으로 갔고, 조경환은 나머지를 영솔하고 광산군 어등산(魚登山)으로 가서 적과 교전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두 부대가 모두 참패를 당하고 김태원이 중상을 입었으므로 함께 함평의 당산촌(堂山村) 나평집(羅平集)의 집에 은신하였다.
4월 8일부터 함평의 지월치(芝月峙) 표군팔(表君八)의 집에서 전략수립을 위하여 막료회의를 주재하였으며, 5월 5일에 이르러 전해산(全海山)이 의진을 영솔하여 왔다.
6월 2일 영산으로 가서 동곡(桐谷)에서 이대왕(李大旺)의 의진과 합세하여 적의 포수 1명을 생포하였다.
6월 30일 전해산과 다시 의병을 나누어 동각리(東角里) 유군발(柳君跋)의 집에 묵으면서 의진을 정비하고 있던 중 김태원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9월 7일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후 중의에 따라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호남창의대장이라 칭하고 각지 향교에 수차 격문을 발송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전군을 영솔하고 흑석리(黑石里)로 가서 경찰대와 교전한 결과 대장 정득주(鄭得柱) 이하 수명을 생포하였다.
10월 2일 오수산(烏首山)에서 교전하여 일병 수명을 무찔렀고, 7일에는 함평의 석문(石門)에서 적 수십 명을 무찔렀다. 29일에는 장성(長城)의 고산(高山)에서 휴군하던 중 대치(大峙)에서 전해산의 의진이 적과 교전 중이라는 정보에 접하고 의진을 이끌고 대치로 가서 응원하여 적 수십 명을 생포하였다.
11월 8일 광주의 동촌(東村)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며, 11월 25일 전해산 의진의 유완요(柳完堯)와 김여효(金汝孝)의 세 의진이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적 수십 명을 무찔렀다.
이와 같이 연전연승하던 의진은 1908년 음력 12월 19일 구정을 앞두고 과세차 의병을 귀향시키고 몇 명의 막료와 함께 어등산 사동(寺洞)에 은신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기증 받은 백마를 타고 이리저리 내달으며 일병을 무찌르던 중 적탄이 오른쪽 가슴에 연달아 두 발이 명중되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깨달은 조경환은 목에 걸린 망원경을 벗어 놓고 왼쪽 품안에 깊이 간직하였던 의진의 명단을 꺼내 불사른 후 조용히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