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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8월의 독립운동가] 강제하, 이웅해, 백남준, 최명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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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8-01 17:56 조회1,34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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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도 및 훈격

 

강제하(康濟河 1891~미상), 건국훈장 독립장(1995)

이웅해(李雄海 1878~미상), 건국훈장 독립장(2010)

백남준(白南俊 1889~미상), 건국훈장 독립장(2014)

최명수(崔明洙 1889~1951), 건국훈장 애국장(1991)

 

 

공적상세


□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강제하·이웅해·백남준·최명수 선생을 2022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ㅇ  1922년 8월 환인현(桓仁縣)에 독립운동 단체 대표 50여 명이 모였다.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김승만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통합의 방법을 논의하여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ㅇ  통합 독립운동체인 통의부는 두 가지의 임무 달성을 목표로 탄생되었다. 첫째는 경신참변으로 폐허가 된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립군의 근본 목표인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해 이어가는 것이었다. 

 ㅇ  2022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웅해(李雄海)·백남준(白南俊)·강제하(康濟河)·최명수(崔明洙) 등 네 분은 이 남만주 통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통의부를 이끌어 간 주도적 인물들이다.  

□ 1878년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오노동에서 출생한 이웅해는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했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서간도로 망명했다.

 ㅇ 이웅해는 통의부를 성립시키기 위한 회의인 남만한족통일회의에 22명의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군 대표로 참가했다. 그리고 통의부가 탄생되고 난 후에는 총장 김동삼 밑에 편성된 8개의 자치조직 중 민사부장에 선임되었다.

 ㅇ 통의부는 성립 후 자치와 무장활동을 충실히 수행하며 남만주지역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웅해는 계속 남아 민사부장에 이어 재무부장을 맡으며 통의부를 이끌었다.  

 ㅇ 참의부에서도 그와 함께하기를 원했으나 모든 것을 뿌리치고 북만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그러가 1928년 12월 경 일제 경찰대에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당해 징역 8년을 언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남만한족통일회의 개최 시 광복군총영의 대표로 참가한 백남준은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 독립군 지휘관 중 한명이다. 

 ㅇ 남만주 흥경현으로 망명하여, 교육자 및 한인단체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20년 초, 서간도 관전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의 광복군이 성립되었고 무장활동 별동대인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다. 백남준은 오동진이 총영장이 되어 이끈 부대의 군사부장 겸 참모부장에 선임되어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ㅇ 남만한족통일회의에 백남준은 김창의·장영해 등 4명이 동지들과 광복군총영의 대표로 참가해 통의부를 성립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으나 초기에는 통의부의 직책은 맡지 않았다.

 ㅇ 1923년부터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24년 11월 24일 통의부에 이은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성립 시까지 이 직책으로 통의부를 이끌어간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ㅇ  1932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성립된 후, 한국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지자 피체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에서 권업부장으로 활동한 강제하는 정의부에 이어 조선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남만주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ㅇ  통의부 성립초기 강제하는 기존의 독립군세력을 수습하느라 함께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곧 통의부에 가담해 독립군의 모태가 되는 한인사회와 독립군의 생계를 책임지는 권업부장을 맡았다. 

 ㅇ  통의부는 1924년 11월 24일 서로군정서 등 7개 단체와 통합해 정의부를 성립시켰다. 정의부에서 강제하는 중앙행정위원에 선임되고, 이후 정의부에서 대표회 위원,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단체의 최고위 간부로서 역할을 다했다. 

  ㅇ  강제하는 조선혁명당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이후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어 갔다. 대한민국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최명수는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곧바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국내에서 건너 온 신민회(新民會)인사들과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적극 참여했다. 

  ㅇ  1910년을 전후해 서간도로 망명한 민족운동자들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경학사를 세웠다. 이후 통화현으로 옮겨 조직의 체계를 새롭게 하고 단명을 부민단(扶民團)으로 바꿨다. 최명수는 단총(團總)에 선임되어 부민단의 실무를 이끌었다.

  ㅇ  통의부에서 최명수는 검무국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통의부에 이어 1924년 11월 정의부가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탄생했다. 최명수는 이 단체를 성립시키기 위한 전만통일회에 길림주민회 대표로 참가했다. 정의부가 성립되고 초기 조직을 정비할 시기 자치분과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조직이 완비되고 난 후에는 검리장(檢理長)에 임명되었다. 

  ㅇ  1920년대 후반 만주를 떠나 상하이(上海)로 갔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활동 중 1934년 12월 6일 일제의 상하이영사관 경찰대에 피체되었고 국내로 압송되어 1935년 6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