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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10월의 독립운동가] 장지영, 김윤경, 권덕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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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9-29 15:31 조회2,1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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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도 및 훈격

 

장지영(1887~1976), 건국훈장 애국장 (1990)

김윤경(1894~1969), 건국훈장 애국장 (1990)

권덕규(1891~1950), 건국훈장 애국장 (2019)

 

 

공적상세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장지영(1887~1976), 김윤경(1894~1969), 권덕규(1891~1950)선생을 2021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ㅇ 장지영·김윤경·권덕규 선생은 일제의 우리말 탄압에도 꿋꿋하게 한글을 연구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데 큰 공을 세우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노력으로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말의 보전과 과학적 연구가 가능했으며, 민족의 얼을 지킬 수 있었다.

 

장지영(張志暎) 선생은 192112월 권덕규·김윤경 선생 등과 휘문의숙에서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조선어연구회1909년에 주시경 선생이 조직한 국어연구학회를 계승한 한글 연구 단체이다.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法理) 연구를 목적으로 한글연구와 표준어 확립, 사전 발간 사업을 했다.

 

ㅇ 또한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맞춤법 규정에 대응하여 한국어의 특징에 부합하는 맞춤법을 마련하는 등 한국어와 한국문화 보호에 힘썼으며 19272월 최초의 국어 전문잡지인 한글이 창간되었다.

 

194210월 조선어학회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정지영 선생은 이극로·최현배 선생 등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모진 고문과 취조 끝에 194410월 예심면소로 석방되었으나 후유증인 신경통으로 평생을 고생했다. 게다가 불온사범으로 간주된 탓에 안정적인 주거와 직업을 얻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ㅇ 광복 이후 장지영 선생은 1945년부터 48년까지 문교부 편수부국장, 1945년부터 58년까지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봉직했으며 평생 한글연구에 매진하였다.

 

김윤경(金允經) 선생은 19111월 서울 남부 상동(尙洞)의 사립청년학원(私立靑年學院)에 입학하여 평생 은사인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을 배웠다. 이때 외국에서도 한국의 우수성이 중시된다는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국어 연구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192112월 장지영·권덕규 선생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였다. 또한 선생은 조선어사전편찬위원으로 선임되어, 한글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였다.

 

ㅇ 선생은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한 한글사업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0년에는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31년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됐다. 아울러 한글 교육과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1931년 동아일보의 지원으로 권덕규 선생 등과 전국을 순회하여 한글을 강습했다.

 

ㅇ 선생은 193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혹독한 고문을 속에서도 한글 연구는 멈추지 않았으며, 1938년 수감 중에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가 발간되었다. 오랫 재판 끝에 194110월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그는 19424월부터 성신가정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ㅇ 그러나 또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가혹한 옥고를 치루고 19439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ㅇ 해방이후 19458월 조선어학회 상무이사가 되었고, 동년 10월에는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이후 연희전문학교 총창 대리로 임명되어 연세대학교를 운영하고 민족교육 사업에 주력하였다.

 

권덕규(權悳奎) 선생은 1910년 서울 휘문의숙에 입학하며 주시경 선생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일찍이 한글연구에 입문햇다. 더불어 한국 고유의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광문회 사업에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김두봉·이규영 선생과 함께 주시경 선생을 도와 최초의 한글 사전말모이편찬에 참여하였다.

 

1929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제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어학회와 동아일보가 주관하는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 참여했으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선생은 1930년 동아일보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한 특집 기사에서 조선어문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1930년 맞춤법 제정위원으로 참여하고, 1932년에는 한글학자 17명과 함께 조선어철자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며 전국적으로 한글강연회를 다녔다. 그리고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발족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에도 참여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으나 이때 선생은 1940년부터 중풍이 있었고, 와병 중인 탓에 구속되지는 않았으며, 19434월에 기소정지 처분을 받았다.

 

ㅇ 광복 이후에도 병마로 인해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하고 1945년에 이전에 써놓은 조선유기, 조선유기략을 축약 편집한 조선사(朝鮮史)를 간행했고 1946년에는 수필과 기행문을 모아을지문덕(乙支文德)을 발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장지영 선생과 김윤경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권덕규 선생에게는 2019년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