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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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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1-31 14:41 조회5,445회

본문

생몰연도 : 1892 ~ 1944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 (1962)

 

공적개요

 

- 1919년 일본 동경, 2·8 독립선언에 참여

 

- 1919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

 

- 1922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 선임

 

- 1928년 미국에서 근화회 조직회장 역임

 

공적상세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 사이의 세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마리아는 개신교의 세례명인데 독실한 개신교신자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다.

선생의 집안은 서울의 명문양반가였으나 고조부 때 낙향하여 대지주가 되어 만석꾼 김참판댁으로 불려졌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한 뒤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종사하던 개화인사였다. 집안 내 개화문명에 남다른 관심과 적극적인 수용 덕분에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다수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셋째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은 신민회원으로 한국최초의 의사가 되어 만주 통화와 치치하얼에서 한인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셋째 고모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으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고모부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그 외에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다.

이렇게 선생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개화 지식인이자 애국지사였던 부친과 삼촌, 그리고 고모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어 갔다.

1899년 선생은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에 입학해 고모·언니들과 같이 다니면서 기독교의 박애주의와 평등사상에 입각한 신학문을 익혔고, 1903년 졸업하고 어머니를 도와 가사를 돌보았다. 1905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906년 서울로 이주하였다. 상경한 선생은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였다. 1906년 6월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비로소 기독교사상에 입문하게 되었고 신앙심이 깊어져 1908년 세례를 받았다. 이즈음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점증되던 국망의 위기의식 속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고, 또 삼촌의 집에 드나들던 안창호·김규식·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의 초조한 발걸음을 보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 갔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다.

1910년 8월 조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교육 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의 꿈을 접지 않고, 한 톨의 밀알이 밀밭을 이루듯이 민족문제 해결에 여성들이 앞장설 것을 역설하였다. 선생은 알찬 후진교육을 위해 1912년 가을 1년간 히로시마 고등여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 

1913년 은사들의 추천으로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이듬해 선생의 재능과 조국에 대한 열정에 감동한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일본의 동경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으로 유학가게 되었다. 유학의 목적은 조국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1915년 5월 동경여자학원 본과(당시 고등여학교)에 들어가 1916년 3월에 졸업하고 이어 고등과(당시 전문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19년 3월에 졸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선생은 일본 유학생활 중 1915년 4월 막내 고모인 김필례와 나혜석 등이 중심이 되어 재경 (在京)조선여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품성 함양을 목적으로 조직한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1917년 10월 임시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되어 일본 전체 여자유학생회의 대표가 되었던 것이다. 대표로써 이 단체를 확대시켜 갔으며, 『여자계(女子界)』를 기관지로 발행하였다. 이 기관지를 통해 여성의식의 자각은 물론 민족의식고취에 도 앞장섰다.

이즈음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1918년 1월 8일 전후 처리 지침으로써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그 해 11월 11일 종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선생과 황애덕(黃愛德)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선생과 황애덕 등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2·8독립선언 당일에는 동경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석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황애덕과 같이 등단하여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성토 규탄하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일제와 투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2·8독립선언 대표들은 물론 선생을 비롯한 수십 명의 학생들도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다행히 석방된 선생은 2월 15일 황애덕과 상의하여 동경의 조선독립운동 상황을 전달하고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같은 인식 아래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2월 17일 동경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3월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대구에서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위해 밀사로 파견한 큰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만났다. 이들은 안희제(安熙濟)가 경영하던 백산상회(白山商會)로 가서 활동계획을 논의한 뒤, 선생은 대구로 가서 기독교계 동지들을 찾아 자신이 가지고 온 2·8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거족적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광주에 도착하여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있던 큰언니와 고모의 주선으로 교직자와 간호원들을 초대하여 여성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2월 21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황애덕을 다시 만나 함께 이화학당 교사인 박인덕(朴仁德)·신준려(申俊勵) 등을 만나 동경 2·8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하면서 여성 독립운동의 전개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어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책임을 맡았던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李鍾一)은,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 및 보성사를 찾아 와 동경 한국인 남녀 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하고, 김마리아는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할 것을 힘써 권유하였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중이며, 또 지난 갑인년(1914)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하여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하였다."

고 그의 비망록에 기록하였다. 이로 보아 선생은 2·8독립선언 직후 그 같은 민족 독립운동의 열기를 국내에 전파하여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촉발케 함으로써 조국 광복을 성취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황해도 봉산(鳳山)과 신천(信川) 등지를 돌며 지방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였다. 선생은 3·1운동의 소식을 듣고는 지속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고자 서둘러 상경하여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달려갔다. 이 날이 서울의 학생들이 남대문역(서울역) 앞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3월 5일 바로 그 날이었다. 물론 이 날 만세시위에 정신여학교의 학생들도 대다수 참여하였기 때문에 일경의 방문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때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일경의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 뒤, 3월 27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여기에서도 선생은 약 6개월간 갖은 악형과 고문을 받았지만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으로 이를 이겨내, 결국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예심 면소(免訴) 결정이 되어 석방될 수 있었다.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더욱 강인해진 독립의지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지속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강구하였다. 그런 가운데 선생은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선생이 체포된 뒤 정신여학교의 동창들은 3·1운동으로 투옥된 남녀 애국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의 보호를 위해 혈성부인회(血誠婦人會)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여성들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 후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조국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임시정부의 지시로 이들 두 단체는 통합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활동은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때문에 선생은 출감 후 자주 만나던 황애덕과 상의하여 이 단체를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하는 한편, 임원 개선을 통하여 침체된 여성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출감 후 기거하던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의 집에서 애국부인회 임원진을 만났다. 여기에서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그를 위한 선행 조치로 선생을 회장, 황애덕을 총무부장으로 선임하였다. 그리고 애국부인회의 본부 및 지부 규칙을 제정하고, 부서 개정과 임원 개선 등을 단행하여 조직을 혁신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과 이들 임원들은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고 하는 설립 취지문을 채택하고, “본회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국권을 확장하는데 있다”고 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선생과 주요 임원들은 조직 확대 작업에 들어가 서울·대구를 비롯하여 부산·전주·진주·평양·원산 등 남·북한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였고,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 방략으로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 수합 활동을 벌여 그 해 11월까지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실적을 올렸다. 그러던 중 조직원의 배신으로 11월 28일 선생을 비롯한 임원진 등 52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북도 경찰국으로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대구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황애덕과 함께 3년형을 받았다.

이 사이 선생은 일제의 고문과 악형을 당하여 병보석으로 1920년 5월 22일 출감한 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서 중국 망명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1년 7월 10일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인천에서 배편으로 탈출하여 약 1개월 간의 여행 끝에 8월 초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상해에서 서병호의 부인인 큰 고모 김구례(金求禮)와 셋째 고모인 김순애의 도움으로 고문 후유증을 치료하면서 건강 회복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남경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임시정부는 1921년 1월 26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사임, 이어 5월 12일 노동국 총판 안창호(安昌浩) 등 주요 국무위원의 사퇴, 그리고 정부 조직 후 처음으로 상해에 도착하여 정무에 임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돌아감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하여 가고 있었다. 때문에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최고 통솔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가 독립운동계의 중요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을 사퇴한 날인 1921년 5월 12일 상해 3·1당에서 열린 유호(留?, 상해)동포연설회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그 촉성기관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발기하였다. 나아가 그 해 6월 6일 정식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출범시켜 본격적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짐에 따라 상해는 물론 만주·노령·미주 등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여기에 참여하였고, 또 이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에서 1922년 1월부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극동 인민 대표회의)가 개최됨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여기에 대거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는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가시적 성과도 없이 1922년 2월 초 두 회의가 끝나자 국민대표회의의 개최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계의 초미의 관심 속에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자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의에서,

"국내의 일반 인민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소수인의 조직이거나 인물의 좋고 나쁨을 불문하고 다 기뻐하여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敵)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설혹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라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을 보아도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는 증거이다. 임시정부를 안 팔면 밥도 못 얻어 먹는다. 적은 가끔 임시정부의 몰락을 선전하여도 인민은 안 믿는다. 소수로 됨은 혁명시에 피할 수 없는 일이요 인물은 변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만의 유혈로 성립되어 다수 인민이 복종하고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만일 말살하면 소수는 만족할 지 모르나 대다수는 슬퍼하고 외인(外人)은 의혹.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 

고 하여 임시정부 법통성의 고수와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다만 각원 개선 등 개조 방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創造派)와 현재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논쟁을 거듭하였다. 기대와는 달리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제(諸) 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이같은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의 난맥상과 분열에 실망한 선생은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그 해 6월 21일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11일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한 선생은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의 도움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 뒤 선생은 1924년 9월 미국 미네소타주 파아크빌시에 있는 파아크대학에 입학하여 2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다시 1928년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며 학부과정과 연구과정을 마친 끝에 1929년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이같은 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2월 12일 황애덕·박인덕 등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이 회의 회장으로서 회원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대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재미 한인사회의 일반 운동을 적극 후원”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0년에는 뉴욕의 비블리컬 세미너리(Biblical Seminary)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1932년 7월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말미암아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원산(元山)의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하였다. 신학교에서도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