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연도 : 1876 ~ 1949
○훈격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년)
○공적개요
- 1904년 애국계몽운동
- 1919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활동 지휘
- 1940년 임시정부 주석
○공적상세
1876년 7월 11일(양력 8.29)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金淳永)과 모친 현풍 곽씨(玄風郭氏) 낙원(樂園)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다른 이름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를 쓰고,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1879년(4세)에 천연두를 앓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9세가 되던 1884년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합격자 이름이 나도는 타락한 과거시험에 실망을 느꼈다. 그 뒤로 선생은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읽어 나갔다. 관상공부를 하던 선생은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아 크게 실망하다가, 그 책에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는 구절에 빠졌다. 아무리 관상이 좋아도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이 말에 선생은 호심인(好心人)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이듬해(1893)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힌 선생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로 임명되었다. 1894년 9월 탐관오리를 내쫓고 서양오랑캐와 왜를 물리치자는 깃발을 올리며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海州城)을 공격했으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나라 위한 평생의 첫 걸음이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20세 되던 1895년 2월 동학 봉기가 한계에 다다르자, 선생은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맡겼다.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나섰으니, 어린 날 두 영웅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학자인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고 선생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일사보국하는 길을 일러주면서,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한 것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 들 것이니,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인물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공감한 선생은 안태훈 진사 집에서 만난 김형진(金亨鎭)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만주로 갔다.
행선지는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이르렀다. 선생은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를 만나 이에 합류하였다. 1895년 동짓달 초에 선생이 참가한 의병부대는 고산리(高山里)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실패한 선생은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1895년 명성왕후 살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온 나라에서 의병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를 다녀온 선생은 안악으로 되돌아오다가 한 사건과 마주쳤다. 1896년 2월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 스치다(土田讓亮)를 만난 것이다. 이때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넉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國母)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일본인이 숨기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과 함께 주소와 이름을 써 붙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인이 흔하지 않던 시절인데다가, ‘국모시해사건’이 터진 직후였고, 게다가 칼을 숨기고 다니는 일본인을 바라보는 선생의 눈에는 그가 미우라이거나 그 패거리인 장교 또는 밀정으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보며 가슴 가득 원한을 가진 21세의 피 끓는 청년이 우연히 마주친 일본 흉한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뒤 석 달 지나(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 관원에게 붙잡힌 선생은 해주감옥에 갇혔다. 같은 해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옮겨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감시하는 일인 경관 와타나베(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와타나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이 심문을 개시하자, 선생은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 아래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蒙白, 국상으로 흰갓을 쓰고 흰옷을 입음)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라 말했다. 그러자 감리사만이 아니라, 경무관과 청상에 있던 관원들이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높임말을 썼다. 이에 감옥 관리의 대우도 좋아지고 이를 들은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서양문물에 눈을 떴다.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을 익히면서,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의식도 갖추어 나갔다.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먼 뒷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법부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광무황제(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승지 가운데 한 사람이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발견하고, 재가가 끝난 서류를 광무황제에게 다시 보이면서 의견을 구했다. 이에 광무황제는 어전회의를 열어 논의한 끝에 사형집행을 정지시켰다. 이에 선생은 죽음 직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띄지 않았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더구나 그 명령이 전화로 통보되었는데, 서울에서 인천 감리서까지 전화가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