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연도 : 1888 ~ 1957
○훈격 :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공적개요
-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양성
- 1924년 정의부 군사위원장 및 총사령관으로 국내진격전 지휘
-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역임
-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하여 총사령관 역임
○공적상세
장군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월 7일, 수요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지석규(池錫奎) 또는 지대형(池大亨)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일 이청천(李靑天)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명은 수봉(壽鳳)이었는데,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에는 지석규라는 이름을 썼다. 국내에는 지대형이라는 이름이 본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본관은 충주인데 충주 지씨(池氏)는 조선 후기에 대체로 무관을 배출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후일 만주(중국 동북지방)로 망명하면서 압록강을 지날 때 호를 백산(白山)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백두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본명인 지석규 대신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아버지는 지재선(池在善)이었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였다. 지재선은 장군이 불과 다섯 살 때 작고했기 때문에 성장과정에서 모친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종두법을 실시한 인물로 잘 알고 있는 지석영(池錫永)이 그의 재종속(7촌 당숙)이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자객 지운영(池運永)이 재종숙이다.
1895년 만 7살 때 서당에 가서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1894년에는 일본의 영향력 아래 갑오개혁이 추진되고 소학교와 중학교가 생기는데, 서울에는 교동소학교와 재동소학교, 계동소학교가 설립되었다. 1896년 서당을 마친 장군은 이듬해에 교동소학교 고등과(4학년)에 편입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 지 5년 뒤인 1904년 5월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청년회에 가입해서 활동하였다.
이후 장군은 장교가 되어 기울어가는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육군무관학교는 1896년에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현직 장교나 칙임관 이상 현직 관리의 추천을 받아야 했고,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배경과 실력이 요구되었다. 장군은 어머니 경주 이씨의 노력으로 왕실의 추천을 받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초창기 육군무관학교에서는 군사학 이외에도 외국어 등 신학문을 꽤 높은 수준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군이 재학할 무렵의 육군무관학교는 고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1905년 을사5조약을 강요한 일본이 ‘한국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여러 부문에서 일본의 침략이 자행되었고, 1907년 초에는 벌써 군대예산이 크게 감액되었기 때문이다. 이해 8월에는 대한제국 군대가 거의 해산되고 왕궁을 수비하는 일부 친위대만 남게 되었다. 대한제국 군부도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의 정원도 점차 축소되었다. 이 무렵 입학정원도 초창기 200명에서 50명으로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909년 7월에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무관학교마저 폐교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무관학교 재학생들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시키기로 하는 방침을 정했다.
그 뒤 장군은 일정한 시험을 거친 후 1909년 3월 동기, 후배 등 43명과 함께 일본 육군사관학교(약칭 육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 해 9월에는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에 편입했다. 유년학교란 육사의 예비학교로서 육사 입학 전에 3년 정도 수학하면서 사관학교 생도로서의 자질 강화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다.
장군은 이 학교에 들어가서 1912년 5월 졸업할 때까지 약 2년 정도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 그런데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는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르고 있다. 나라가 망하자 당시 일본 육사 예비과정에 재학하고 있던 한국 학생들 사이에는 상당한 동요가 있었다.
즉 조국이 없어진 마당에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즉시 포기하고 귀국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매우 고민이 컸던 것이다. 조국의 멸망에 비분강개한 이들은 요코하마(橫濱)에 모여 자신들의 거취를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퇴교하고 돌아가거나 자결하자고 하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나왔다. 그런데 연장자인 장군은 이왕 군사교육을 받으러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다 배우고 중위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던지고 조국광복을 위해 총궐기하자고 제안했는데, 논의 끝에 그렇게 하자고 모두 맹세하였다. 이것이 소위 ‘요코하마의 맹세(또는 아오야마의 맹세)’로 전해지고 있다.
1912년 6월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장군은 일본군 보병 10연대 소속으로 6개월간 일본의 히메지(姬路)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했다. 이해 12월 일본 육사에 정식으로 입교하여 1914년 5월 26기로 졸업했다. 이때 졸업한 한국인 동기생으로는 이응준과 신태영(申泰永), 조철호(趙喆鎬), 홍사익(洪思翊) 등 13명이 있었다.
장군은 일본 육사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일본군 제10사단에서 근무하다가 1915년 초 일본군이 중국 칭다오(靑島)에 출병해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과 교전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여기에 배속되어 일본군 부대를 지휘하며 싸웠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국이었고, 영국과 독일은 적대국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출병했던 것이다. 독일과의 전투에서 장군은 상당한 공을 세웠지만, 심리적 갈등을 겪었다. 조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침략전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중위로 진급했는데, 1919년 초 국내에서 일본으로 찾아온 부인 윤씨를 통해 국내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었다. 특히 이해 3월 1일부터 국내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되었던 3·1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경술국치 때 약속했던 동지들과의 맹세를 잊지 않고 있었는데, 국내 민중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전해 듣고 자신의 모순된 처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크게 번민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 결과 3·1 운동 직후 과감한 자기변신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는 3·1 운동 직후부터 몸을 일부러 쇠약하게 한 끝에 부대에서 병가를 얻어 이 해 5월 초에 국내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국내로 돌아와서 망명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일본 육사 3년 선배인 김광서(金光瑞, 후일 김경천으로 알려짐)와 함께 1920년 5월 하순(음력 4월 중순) 드디어 남만주로 탈출하게 되었다. 그 뒤 1년 후배인 이종혁도 역시 중국 동북지방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육사 출신 장교 세사람이 만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항일무장투쟁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1920년 5월 장군은 남만주 류허현(柳河縣) 하니허(哈泥河)에 있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발탁되었다. 망명 당시 그는 최신 군사 서적과 군용지도를 휴대하고 갔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평안북도 압록강 중류 건너편 중국동북의 한인 밀집지역)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성립한 중학과정의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이 학교의 전신은 1911년에 세워진 신흥강습소로서, 유명한 이시영·이회영 형제 등 경주 이씨 일가, 경북 안동의 의성 김씨 일가와 고성 이씨 일가, 경북 구미의 임은 허씨 일가 등 많은 명망가와 이주민들이 주도해 세운 학교였다. 1920~30년대 독립군 간부 및 병사 양성에 크게 기여한 곳으로 유명한데, 최대 2,000여 명의 인재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군은 망명 직후부터 이 학교 교성대장 등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가 이처럼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고 있을 때인 1920년 10월, 일본군은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 계획’이라는 대규모 독립군 탄압 계획을 세우고 중국 동북지방에 대거 침입하기 시작했다.
한편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화 내지는 사회주의화를 추진하는 레닌 중심의 혁명정부와 이에 대항하는 백위파(白衛派) 정권이 수년 동안 격렬하게 투쟁한 끝에 혁명파(볼세비키)가 승리하였다. 이에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을 크게 우려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은 국제간섭군을 출동시켰다. 여기에 일본도 끼어들어 연해주지방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일본군은 러시아 10월혁명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출동했지만, 사실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 세력을 탄압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은 남만주 뤼순(旅順)반도에 합법적으로 관동군(關東軍)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러시아 연해주와 남만주 지방에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킬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일본은 이 정세를 틈타 3·1운동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로 부상한 중국 연변(북간도) 지방의 한민족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1920년 초 소위 ‘훈춘사건’을 조작해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었다. 만주와 연해주지방 양쪽에서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봉오동전투(1920.6)와 청산리전투(1920.10)가 벌어졌다. 이때 서간도(남만주) 지방에는 일본 관동군이 출동했다. 그런데 당시 장군이 활동하고 있던 서간도지방에서는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없었다. 왜나하면 서간도는 북간도 쪽보다 동포의 숫자도 적고 세력기반도 아직 확고하지 못해 일본군과 정면으로 대결할 만한 역량이 아직 없었고, 지정학적으로도 일제 탄압이 북간도지방보다 쉽게 미칠수 있는 등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에 서로군정서 등 서간도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일본군을 피해 북만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장군은 1920년 10월 일본군의 침입으로 신흥무관학교가 폐쇄되자, 100여 명의 재학생과 서로군정서 병력을 데리고 동북쪽 백두산 근처로 이동하였다. 장군과 서로군정서 병력은 1920년 10월 말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독립군 부대 등이 일본군에 일격을 가한 뒤 백두산 북쪽의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퇴각해온 뒤부터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그 이후 북상과정에서 전개한 소규모 전투에 몇 차례 참가하였다.
1921년 1월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다른 독립군 장병들과 같이 러시아 연해주 이만으로 건너갔다. 레닌 혁명정부가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다고 크게 선전했던 데다가,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 간부들이 독립군 부대들을 그곳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만지역은 혁명파를 지지하는 적군(赤軍)과 반군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 3,500여명이 연합해서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이 단체가 개편된 ‘대한독립단’ 군사고문으로 추대되고, 5월에는 자유시(현재의 스보보드니)로 이동했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의해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는데, 그는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장군의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유연한 자세는 항일무장투쟁 역량의 보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해 6월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 와중에 최진동(崔振東)과 허근(許根) 등의 부대가 러시아 적군(赤軍)에 큰 피해를 입은 반면, 그가 인솔하던 부대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1921년 8월 자유시사변 후 한인 무장세력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비에트 적군 제5군 직속 한인 여단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그는 예편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해 말 러시아 원동정부의 원조로 이르쿠츠크에 설립된 러시아 원동(遠東)정부 및 코민테른 등과 대립하다가 체포되어 1922년 4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7월 경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구명운동 결과, 가까스로 풀려나게 되고 이해 말경 러시아에서 중국동북으로 되돌아왔다. 이 때부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편 1923년 5월에는 중국 남부의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의 군무위원으로 선임되고, 같은 해 9월 초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는 신숙(申肅)·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 등 국민대표회의의 주요 간부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였다. 코민테른과 한명세(韓明世), 이동휘(李東輝) 등 한인 민족운동 지도자들에게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24년 초 독일혁명이 실패하고 레닌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별 성과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1925년에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1928년 말부터 3부 통합 운동의 여파로 남만주지방에서는 정의부를 중심으로, 그리고 북만주지방에서는 신민부 계열을 중심으로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세력이 통합되었다. 이리하여 1929년 중반경 정의부 후신으로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고, ‘이당치국(以黨治國)’ 원칙에 따라 국민부를 지도하는 독립운동 정당 조선혁명당이 생기며 무장세력으로 조선혁명군이 창건되었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신민부 및 혁신의회 계열 인사들이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는데, 역시 이 조직을 이끄는 한국독립당이 결성되고 산하 무장조직으로 한국독립군이 창건되었다. 이때 장군은 ‘혁신의회’ 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장군은 1920년 말부터 1933년 후반기까지 주로 북만주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그 배경에는 하얼빈 부근 북만주 지방에 경상도나 전라도, 기호지방 출신 농민들이 많이 이주해온 원인이 컸다. 연변지방은 함경도, 남만주지방은 평안도 출신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그는 1930년 1월 북만주의 위허현(葦河縣)에서 홍진(洪震)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군사위원장이 되었다.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일명 9·18사변)’이 일어난 뒤, 중국동북 각지에서 중국의용군이 봉기하였다. 이에 같은 해 10월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총사령에 취임하였으며, 중국의용군과 합세하여 주로 하얼빈(哈爾濱) 부근의 북만주 일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한국독립군을 지휘하며 1932년 6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북만주 하얼빈 부근의 중동철도(中東鐵道) 연변과 동만주 지방에서 일본군과 괴뢰 ‘만주국’의 국군인 만주국군, 경찰 등을 상대로 여러 차례 치열한 무장항쟁을 벌였다.
장군의 이처럼 엄격한 지휘와 장병들의 죽음을 무릅쓴 분투결과 한국독립군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군수물자의 노획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전투가 한민족의 독립전쟁사상 가장 많은 전과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군 수송부대를 습격해서 군복 3,000여 벌과 소총 1,500정, 대포와 박격포 13문, 담요 3,000여 장, 군량·군수품 등 마차 200여 대 분량을 빼앗았던 것이다. 반면에 이 전투에서 입은 한국독립군의 피해는 별로 없어서 경상자 4·5인이 발생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해 말 장군이 이끌던 한국독립군은 연합해서 싸우던 중국인 부대와 불화가 생겨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중국군관학교에 한인 특별훈련반을 개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장군을 비롯하여 조경한(趙擎韓), 오광선(吳光鮮) 등 한국독립군 장병 40여 명이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장군은 난징(南京) 등 중국 남부지방으로 간 뒤 1934년 3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분교 한인특별반의 총책임자가 되어 한인 청년 90여 명을 훈련시켰다. 이듬해에는 김원봉(金元鳳) 등과 연합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군무부장을 겸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군사부문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장군이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940년 9월 17일! 드디어 중국 충칭(重慶)에서 오랜 숙원이었던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건되었다. 장군은 이때 한국광복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해방 직후까지 줄곧 한국광복군을 총지휘하였다.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행사에서 그는 비단에 ‘조국광복’이란 글자를 새겨 만든 광복군기를 헌정받았다. 그 뒤 장군은 총사령관으로서 답사를 하였는데, 이를 한 목격자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헌기(獻旗)를 마치자 총사령관은 늠름한 기상과 장엄한 태도로써 정면을 향하야 다시 축립하였다. (중략) 그는 간곡하고도 겸손하며 견결하고 비장한 어조로써 간명한 열변을 토하야 청중을 감동시켰다. (중략) 그는 말하기를 비록 자기의 재덕은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나, 각계의 호의를 보답하며 군인의 천직을 다하기 위하야 국궁진췌(鞠躬盡?)하야 사이후이(死而後已)하겠다고 하였다. 비록 그 말은 겸손하지만 그 중에 비장한 뜻이 가득찼었다. 그는 중국 각방에 산재한 우리 무장청년들과 또 기타 각 방면의 우리 열혈청년들이 광복군 성립되는 소식을 듣고 바람에 구름 밀리듯이 일제히 모여드는 중이라고 보고하고, 동시에 우리 조국과 민족의 해방 여부가 전혀 광복군이 목적을 관철하고 못하는데 달렸으니 동지 동포는 인력·정력·물력을 군으로 집중하여 달라고 호소하였다.(「광복군성립전례 배관기(典禮 拜觀記)」)
“국궁진췌(鞠躬盡?), 사이후이(死而後已)”는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국가의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몸을 상할 정도로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죽은 다음에야 그쳐야 한다는 각오를 밝힌 글이다. 장군의 독립전쟁에 임하는 각오를 잘 알 수 있다.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은 고운기(高雲起)의 ‘고중국전방장사서(告中國前方將士書)’ 낭독으로 종료되었다.
이로써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후 그는 총사령관으로서 1947년 4월 환국할 때까지 중국대륙에서 중국?미국 등과 힘을 합쳐 일제 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해 맹렬히 활동하였다.
1941년에는 한국광복군 지대(支隊)를 편성하고 중국 각지에 파견하여 사병모집 및 훈련, 선전과 정보 수집, 적정 정찰, 유격전 전개 등의 임무를 수행케 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 초기에는 1·2·3·5지대 등 4개 부대 편제를 유지하였다. 제1지대장 이준식(李俊植)은 산시성(山西省) 따둥(大同)에서,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은 수웬성(綏遠省) 파오두(包頭)에서,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는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서,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은 시안에서 활동하면서 병력모집과 정보수집 등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광복군은 1942년 5월 김원봉이 거느리는 조선의용대 병력 일부의 한국광복군 합류결정이 내려지면서 큰 전기를 맞이하였다. 이해 12월 김원봉이 한국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하고 제1지대장을 겸임하였으며, 제2지대장에 이범석, 제3지대장에 김학규가 선임되어 중국 국민당정부 관할지역에서 중국군과 함께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말 한국광복군 대원은 60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장군은 후일 국내로 돌아와「광복군과 나의 투쟁」이란 글을 남겼는데, 한국광복군 창설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는 다시 광범위한 광복군을 조직하고자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수락하고 무대를 중경으로 옮겨 광복군 조직에 전력을 다하였다. (중략) 중국정부에서도 우리들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자기네들에게 유익한가를 알기 때문에 제반 사정에 자연히 동정을 얻게 되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광복군 조직계획을 수립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던 바, 쾌히 승인을 얻어 나 자신이 광복군 총사령관의 중책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장군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이 무렵 활동은 장준하의『돌베개』에 잘 묘사되고 있다. 한국광복군은 일제의 패망 직전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벌였고, 미군과 OSS 전략첩보 및 특공작전을 준비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일제의 패망 직전인 1945년 4월 주중(駐中) 미군과 OSS(전략첩보) 특공작전 협정을 맺고 한국광복군 정예요원들을 국내로 비밀리에 침투시키는 특수공작이 추인되었던 점이다. 일본의 패망직전에 OSS훈련을 받은 대원들을 국내로 침투시키는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 해 8월 초 제1기생 훈련이 완료되자 장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함께 시안(西安)으로 갔다. 그리고 제2지대 본부에서 OSS책임자인 도노반(William B. Donovan) 소장과 국내진입작전을 협의하였다. 이 과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우리들의 염원인 우리 조국 삼천리강토에의 진주(進駐)를 실현코저 그 공작에 착수하였던 것이니 당시 미국의 주중미군 현지사령관이었던 웨드마이어 장군의 정신적 물질적인 원조를 받아 그 휘하 장병들과 긴밀한 연락하에서 다수의 우리 광복군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특수비밀훈련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총사령관인 나는 임시정부 김구 주석 및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과 더불어 우리 광복군 제2지대 사무실에서 미국의 주중미군 현지사령부 작전참모장 다노배장군과 우리 임시정부와 미국사이에 전쟁의 종막(終幕)에 이르는 시기까지 군사협의를 맺었던 것이며, 이 협의에서 미국은 제1차로 특수훈련을 받고있는 우리 광복군 선발군인들을 각종 비밀책임을 명하여 산동(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으로 우리 조국 삼천리강토 내에 잠입시켜 중요 지점을 파괴 또는 점령케 하는 동시에 때를 잃지 않고 우리 광복군 및 미 지상군을 미공군기로서 낙하하는 동시에 해상으로는 속속 진주군을 상륙시켜서 점령할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장군, 『광복군과 나의 투쟁』)
이처럼 장군은 미국의 OSS와 공동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하는 데 합의를 이루었다. 국내 진입작전은 광복군 대원들을 잠수함으로 국내에 진입시켜 중요지점을 파괴하거나 점령하는 적후공작을 전개하는 것, 그리고 광복군과 미국 육군을 비행기와 선박으로 상륙시켜 한반도를 점령한다는 2단계 계획이었다. 그러나 합의된 국내 진입작전은 끝내 실행되지 못했다. 이 작전 실행 직전인 8월 10일 일본의 항복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1일 장군은 중국의 매우 어수선한 정세에서 민필호(閔弼鎬)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駐華)대표단(단장 박찬익)의 대표를 맡아 동분서주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이후 남은 업무 처리, 중국내 한인 동포 보호와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의 생활보장 문제, 환국문제 처리, 한국광복군 훈련과 일본군내 한인 사병의 광복군 편입을 통한 확군, 임시정부를 대신한 중국 정부와의 교섭이나 연락 등의 중책을 맡았던 것이다.
장군은 1945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성립 제5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당면과제를 밝히고, 한국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중국·미국·영국 등 세 열강의 지속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한국 임시정부는 현금(現今) 그 능력을 다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독립을 얻게 하였고, 만일 한국 인민이 노력 분발치 아니한즉 중·미·영 3국이 카이로에서 발표한 선언 중에 한국에 독립을 주겠다는 사실이 실현되지 않을 터이다. 또 말하기를 중국이 사로잡은 대부대의 왜군 증 한국적(韓國籍) 민(民)은 중국정부에서 한인 혁명군과 합작하기를 허락했으니, 이를 가져 한 큰 신한국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 우리는 중?미?영의 원조를 감사하는 외에 아울러 3강이 계속 원조하기를 바란다.(『신한민보』, 1945.9.27)
장군의 뛰어난 국제정세 안목과 열강의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우려, 한국광복군을 확충하여 장차 독립 한국의 정규군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발언이다.
아쉽게도 해방 이후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에 의해 교전단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장군은 1947년 4월 21일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28년 만이었다.
귀국 직후 그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특히 독립운동 공로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의 기여가 인정되어서인지 처음 치러진 1948년 5?10선거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계속해서 2대 국회의원, 국회외무·국방위원장, 무임소 장관,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군인유가족회 회장,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자유당 원내 대표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처럼 해방 이후에도 중앙정계에서 크게 활약하던 그는 1957년 1월 15일 만 69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장군은 1919년 5월 중국 동북지방(남만주)으로 망명하여 1947년 4월 귀국할 때 까지 만 28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줄기차게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고군분투(孤軍奮鬪)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그리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그는 항일무장투쟁 노선으로 일본 침략세력을 격퇴하고자 27년간 줄기차게 독립전쟁에 매진한 참 군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