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공지사항

[1월이달의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1-02 15:21 조회5,624회

본문

86da73c4da795b023bf432fdfce0e655_1577946059_17.png


 

생몰연도 : 1862.12.13 ~ 1907.09.02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충절의 가문에서 태어나다 

정용기 선생은 영일정씨(迎日鄭氏)이다. 시조는 고려 예종 때 향공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인종 때 예부시랑과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이다.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신하되기를 끝내 거부하다 목숨을 잃은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시조 정습명의 10세손이다. 포은 선생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인으로서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려 말 이래 충절의 상징이 되어 온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략으로 영천성(永川城)이 함락되자, 향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장 강의공(剛義公) 호수(湖?) 정세아(鄭世雅; 1535~1612)는 시조 정습명의 15세손이다. 또 그의 장남 의번(宜藩)은 부친이 경주성에서 왜군에게 포위당하자 부친을 구출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조정은 그에게 이조참판직과 함께 충효가문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이들 부자가 동시에 공을 쌓아 포은 정몽주에 이어 영일정씨 ‘충절가문’의 가풍을 이루었다.

 

부친 정환직이 고종의 밀지를 받들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일제가 파견한 이토(伊藤博文) 통감에게 외교뿐만 아니라 국정의 모든 분야까지 간섭을 받게 되었다. 정부 대신들은 고종 보다 통감의 눈치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이 때문에 친일 인물이 아니면 궐내 출입마저 어려웠고, 고종도 감시를 당하는 지경으로 이어졌다.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침략 책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국가 존망에 대한 위기의식은 궁궐 안팎으로 점점 더 높아져 갔다. 이러한 때인 1905년 12월 5일(양12.30), 고종은 시종관(侍從官) 정환직을 불러 “경은 화천(華泉)의 물을 아는가?”라고 말한 뒤 ‘짐망(朕望, 짐은 바라노라)’이라는 두 자로서 밀지(密旨)를 내렸다. 정환직은 이를 받들고 주변의 감시를 피해 눈물을 머금고 조용히 물러나왔다.

‘화천지수’는 중국 춘추시대에 제나라 경공(頃公)이 제후국 연합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장졸들은 다 흩어지고 주군인 경공도 포로가 될 위기에 이르렀다. 이때 주군의 우편에서 수레를 몰며 호위하던 장수 봉축보(逢丑父)가 주군의 수레에 올라가 자신의 옷과 주군의 옷을 바꾸어 입고 달려 오는 적장들 앞에서 말 고비를 잡은 경공을 돌아보며, 목이 마르니 급히 가서 화천의 물을 떠 오라고 명하였다. 주군인 경공은 이 틈을 타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가 있었고, 장수 봉축보는 주군 대신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는 고사이다. 고종이 통감부와 친일인물들의 극심한 감시 속에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서 자신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친명을 받들고 의진을 일으키다 

선생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12월 10일 영남으로 내려왔다. 먼저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을 만나 모든 것을 의논하고 계획하였다. 문제는 역시 군사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와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지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던 의병장들이 다투어 모였다. 고종의 밀지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밀지는 그 어떤 명분보다도 창의에 대한 당위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의병을 진압하려는 각지의 초토관들에게 경고문을 띄웠다. 관직과 녹봉은 임금이 내린 것인데 임금과 백성을 위해 힘쓰지 않고, 사리사욕과 민패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또 도적을 잡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면서 개인의 재산과 마을을 몰살하고 다니는 것이 과연 옳은 처사인지를 반문하며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6년 봄 영남지역에서 모인 1,000여 명의 장정들이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대장을 사양하였으나 결국 수락하였다. 선생은 대장에 올라 진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하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산남’이란 영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1906년 2월(양 3월) 영천에서 산남의진이 결성되었다.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총수로, 선생을 대장으로 하고 중군ㆍ참모장ㆍ소모장ㆍ도총장ㆍ선봉장 후봉장ㆍ좌영장ㆍ우영장ㆍ연습장ㆍ도포장ㆍ좌익장ㆍ우익장ㆍ좌포장ㆍ우포장ㆍ장영집사ㆍ군문집사 등 16개 부서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전체 규모는 약 1,000이었고, 각 부 장령은 본영의 지휘에 따라 각기 50~100명의 소부대를 지휘하였다.

 

진위대의 간계로 대구로 압송되다 

선생은 관동으로 북상하여 다시 서울로 진격한다는 애초의 목표를 위해 1906년 3월 5일 출진을 시작하였다. 농사철이 시작되었기에 농민들을 위로할 겸, 농사 피해도 최소한 줄이기 위해 격려문을 발표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부득이 의병을 일으켰으니, 농사는 농사대로 군사는 군사대로 모두 힘을 다하자’고 호소하였다.

선생은 영천을 출발한 뒤 흥해ㆍ청하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의진이 출진한 지 달포가 지났을 무렵, 신돌석 의진 쪽에서 지원을 요청해 왔다. 신돌석 의진은 선생의 의진이 출진한 지 일주일 뒤인 3월 13일 영덕군 축산(丑山)에서 결성되었다. 신돌석 의진은 일본이 대한제국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는 울진 장호동 기지를 먼저 공격하였지만 원주진위대의 출동으로 크게 실패하고 청송군 진보로 물러났다. 그 뒤 의성(義城)을 공격하기 위해 청송 이전평으로 물러나 있던 중 갑자기 안동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자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본진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신돌석 의진과 약속한 연합작전을 펴기 위해 영해를 목적지로 하여 진군하였다. 먼저 청하읍을 향해 나가던 중 1906년 4월 28일 포항시 신광면 우각리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나더니, 자신들은 경주진위대의 병사로서 대장 참령 신석호(申奭鎬)의 명을 받고 왔다며 인사하였다. 선생은 본진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이들을 만나 보니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놓았다. 내용은 ‘존공(尊公)의 대인(大人)이 서울에서 잡혔으니 이를 해결하는데 좋은 기회가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존공의 대인’이란 바로 부친 정환직을 말하는 것이다.

선생이 주위를 둘러보며 곧장 경주로 가야겠다고 하자 중군장 이한구가 동행하겠다고 하였으나, ‘뒷일을 그대에게 맡기노라.’ 하고 홀로 떠났다. 경주에 도착하자 경주진위대장 참령 신석호가 비장한 말로 위로하며, ‘나는 충성스런 의사들이 공연하게 죽으면 큰일에 효력이 없을까 하여 이 자리에서 공의 이해를 얻고자 합니다.’ 하였다. 선생은 그때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신석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의로써 크게 꾸짖었다. 선생의 의기에 눌린 참령 신석호는 진위대 군사들을 시켜 그를 대구경무서로 보냈다. 선생은 대구경무서에 구금되었다가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중군장 이한구는 선생이 대구로 잡혀가자 선생의 종숙 치훈(致勳)을 서울로 보내 부친 정환직에게 급히 사정을 알렸다. 이한구는 의진 부서를 일부 개편하고 이를 지휘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선생의 구속으로 구심점을 잃은 병사들은 상당수는 떠나버렸고, 남은 군사들도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이한구는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덕 달산 덕산리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마침 소모장 정순기도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군사를 서로 합쳐 의진을 재편성하였다. 중군장 이한구와 소모장 정순기의 병사들을 다 합쳐도 8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한구 중군장이 이끄는 의진은 영덕, 흥해, 강구, 청하 등 각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병사들의 희생이 너무 컸다. 더구나 지방 관리들의 회유로 민심마저 크게 돌변하였고, 일본군 수비대도 점점 더 강화되고 있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중군장 이한구는 청송군 진보에서 의진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상황을 『산남창의지』(상)(1946, 20쪽)에서는 “우리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였는데, 저 국록을 먹는 자들이 이를 반대로 선전하여 백성들이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한다. 우리는 민중들의 각성을 기다렸다가 뒷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라고 하였다.

 

영천군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다 

선생이 붙잡혀 구속되었다는 소식은 누구보다도 아버지 정환직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그것은 의진 총수로서 서울에서 군사 100여 명을 광부로 변장시켜 관동(강릉)으로 보내, 북상하는 산남의진과 연합하여 서울을 들이치겠다는 당초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방으로 아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하였다. 다행히 ‘조선의 의사를 해치지 말라’는 특명을 내림으로써, 1906년 8월 3일 대구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선생은 풀려나긴 했으나 4개월 동안의 고초와 시달림으로 당장 의병을 일으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가 몸을 안정시키고 있던 때인 12월 16일, 대구에서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ㆍ부사장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일제가 만든 외채 1,300만원을 정부가 갚을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우리 국민의 손으로 갚고자 한 일종의 경제적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반응이 좋아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경북지역에서도 고령ㆍ성주ㆍ김천ㆍ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여러 관련 단체들이 조직되어 동참하였다.

영천지역에서는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가 조직되고 선생이 회장으로 추대되어 취임하였으며, 단연회 통문을 발표하고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통문의 주요 내용은 일본에 진 외채 1,300만원을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한 달에 20전씩 석 달만 모으면 갚을 수 있다는 것, 영천지역에서도 서로 서로 전하여 한 사람도 빠지지 않도록 할 것, 일본에 진 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노예가 될 것, 나라가 없으면 몸 또한 망하고 나라가 흥하면 몸은 죽어도 영광일 것 등이었다.

선생은 통문에 이어 권고가도 지어 발표하였다. 권고가는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모든 것 그만 두더라도 국채만은 빨리 갚아 자주 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이었다. 이 운동에 앞장섰던 인사들은 전ㆍ현직 관료들을 비롯해서 지방 유지나 상공인ㆍ농민ㆍ상인ㆍ광부ㆍ노동자 등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선생은 국채로 말미암아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이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급히 상경할 일이 생겨, 영천군 단연회 회장직을 자양면 용산리 원각(元覺) 마을의 선비 명암(明庵) 이태일(李泰一, 1860~1944)에게 인계하고 영천을 떠났다.

국채보상운동의 성과는 『대한매일신보』에 9월 27일부터 12월 23일까지 약 3개월 동안 게재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광고」의 의연금 납부자와 납부 금액 등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은 시기적으로는 좀 늦게 시작되긴 하였지만, 참여 상황으로는 나름대로 활발했던 것 같다.

 

의진을 다시 일으키다

선생은 1907년 봄이 되면서 다시 의진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먼저 각 지역에서 활동하였거나 활동하고 있는 옛 부장들을 만나 의논을 하였다. 지난번 제1차 산남의진의 조직과 거의 같은 모습의 의진을 다시 결성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4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의병 모집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일본군과 관군의 활동이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에 인적 물적 자원 조달이 쉽지 않았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재기의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을 각지로 보내 군사를 모아 왔다. 또 그동안 쉬지 않고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역 의병장들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군인 출신을 비롯하여 개인적으로도 여러 명이 들어왔다.

선생은 군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확보하는 일을 어느 정도 끝낸 뒤, 1907년 4월 중순에 의진을 결성하였다. 장정들의 추대로 대장에 취임하고, 중군장, 참모장, 소모장, 도총장, 선봉장, 후봉장, 좌영장, 우영장, 연습장, 도포장, 좌익장, 우익장, 좌포장, 우포장, 유격장, 척후장, 점군검찰, 장영서장, 군문집사 등 19개 부서를 두고 장령을 선임하였다. 각 초장과 종사는 별도로 선정하였다. 당시 1초는 10명으로 편성되었다.

제2차 의진 결성에서 주목되는 것은 군인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진의 전투력이 그만큼 강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군령도 엄격하게 하였다. 선생은 ‘만약 군령을 어기는 자는 군법으로 시행할 것’이라고 하여 진영의 기강을 강화하는 동시에 민폐를 막으려하였다. 정환직 총수도 서울에서 내려와 의진의 여러 부장들을 만나고 1907년 5월, 관동지방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돌아갔다.

선생의 의진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07년 7월경 부터였다. 선생은 본진 약 300명을 2대로 나누어, 1대는 죽장에서 천령(泉嶺)를 넘고, 1대는 신광에서 여령(麗嶺)을 넘어 청하읍을 공격하게 하였다. 본진이 7월 17일 청하읍에 들어 닥치자 놀란 적군들은 동해로 도주하였다. 선생 부대는 읍내로 들어가 창고의 무기 등을 몰수하고, 적의 분파소와 건물 등을 불태운 뒤 도주하지 못한 한인 순사 1명을 처단하였다.

의진은 청하를 장악한 뒤 다시 천령으로 돌아왔다. 몰수한 무기 가운데 불필요한 것 등은 천령 산 속에 숨겨 두었다. 천령으로 돌아온 선생은 일본군 대부대가 포항으로 들어왔다는 척후의 보고를 받았다. 선생은 장령들과 의논하여 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직접 대적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다시 천령을 넘어 죽장으로 이동하였다.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한 선생은 당분간 주변 지역을 돌며 무기와 탄약을 보충한 뒤 북상을 한다는 계획을 각 지대에게 알렸다. 이 후 다시 청송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비가 오는 관계로 영천 신녕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무렵 대구 진위대 참교 출신 우재룡(禹在龍)이 입진하였다. 선생은 부친 정환직 총수에게 무기와 탄약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전투를 계속하다보니 북상이 지연되고 있고, 최근에는 일본군이 유독 북상 통로를 막고 있어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알렸다. 정환직은 이 소식을 듣고 관동에서 대비하고 있는 강릉부대를 영남으로 내려 보내기로 하였다.

선생의 본진이 영천 화북면 자천(慈川)을 거쳐 청송지역으로 들어가자, 일본군이 영천에서부터 본진을 추격해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선생은 곧바로 본진을 2대로 나누어 영천 화북에서 청송 현서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매복하게 하고 기다렸으나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청송읍을 향해 출격했다는 정보를 듣고 방대령(方臺嶺)에서 매복했으나 적군이 오지 않자 군사를 거두어 청송 현서면 벌전(筏田)으로 나아갔다. 본진을 이끌고 의성읍을 공격하려 하다가 기밀 누설로 청송군 안덕으로 갔다.

선생이 이끄는 본진은 1907년 8월 14일 저녁 청송 안덕면 신성(薪城)에 도착하였다. 그때 신돌석 부대에서 주위에 일본군이 많다고 알려왔다. 선생은 본진을 3대로 나누어 주요 지점마다 매복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이 신성지역으로 들어오자 접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8월 15일 새벽이 되자 일본군이 현동 추강(秋江) 뒷산으로 도주하였다. 이 신성전투에서 부장 이치옥(李致玉)이 전사하였다. 의진은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포위하였으나 갑자기 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여 어쩔 수 없이 포위망을 풀고 퇴각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보병 제14연대 제12중대의 1개 소대 병력 약 30명이었다.

그 뒤 선생은 청하군 죽장면 절골 개흥사(開興寺)에 유진하였다. 8월 18일 강릉의병 부대가 내려와 합류하였다. 이에 따라 본진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 또 이날 우포장 김일언이 죽장면 침곡(針谷)에서 일본군 척후 1명을 사살하였다. 이튿날 8월 19일 흥해군 기계면 운주산 안국사(安國寺)로 진을 옮기고 포항을 공격하기 위해 정보원을 연해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안강읍 옥산 원촌(院村)에 도착하니 연해로 나갔던 정보원이 돌아와 ‘포항에는 일본군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쉽게 공격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영천수비대가 영천관포 곧 한국인 보조원을 앞세우고 자양으로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었다. 선생은 본진을 2대로 나누어 유인작전을 폈다. 자양으로 출진한 본진 병사는 약 150명이었다. 얼마 후 출진한 본진 1대가 일본군 1명과 영천관포들을 사로잡아 왔다. 관포는 동포이므로 타일러 보내고, 일본군 1명은 목베어 처단하였다.

선생은 관동으로의 길을 트기 위해 신돌석 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동해 연안 지역으로 길을 찾고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자양전투의 보복으로 영일수비대와 청송수비대가 연합작전으로 선생 부대를 추적하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8월 25일 군사 약 300명으로 청하읍을 공격하여 적 1명을 사살하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 등을 소각하고 다시 천령으로 회군하였다. 이동할 때는 농민이나 상인 등으로 위장하여 추적을 따돌렸다.

일본군 청송수비대는 미야하라(宮原) 소위가 이끄는 보병 제14연대 제11중대 소속 미야하라 소대였고, 영일수비대는 나카오카(長岡) 중위가 이끄는 제12중대 소속 나카오카 소대였다. 1개 소대는 약 30명 정도였다. 그들은 8월 27일 흥해군 기계면 가천동 안국사를 의병의 근거지라 하여 불태웠다. 그들은 의병 탄압을 위해 경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안국사를 불태운 뒤 영일수비대는 8월 28일 영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청송수비대는 계속 선생 의진을 추적하여 8월 29일 진보, 청송을 지나 이튿날 30일 청하군 죽장면 입암으로 들어갔다.

한편 8월 24일 자양전투를 치른 선생은 본영 150여 명을 지휘하여 안국사로 회군하였다. 석양 무렵 종제 진기(溱基)가 진중으로 와서, 부친 정환직 총수가 검단동 향재에 왔다고 하였다. 선생은 핵심 부장들과 함께 곧 바로 향재로 달려가 문안 인사를 올리고 관동으로의 북상 일정이 더디게 된 이유를 첫째, 자신의 병상 생활, 둘째, 무기와 탄약 등 물자의 부족, 셋째, 신돌석 의진의 거듭된 패전, 넷째, 군기 준비의 지연 등이었음을 아뢰었다. 선생이 목매인 음성으로 말씀을 올리자 묵묵히 듣고 있던 정환직도 눈물을 닦았다.


 

○입암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다 

선생은 북상 준비 및 각 지대와의 연락을 위해 각지로 장령들을 파견한 뒤,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9일 죽장면 매현(梅峴)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유숙하며 휴가를 나간 장령들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 4시경 척후병으로부터 ‘추격하는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튿날 9월 1일(양10.7) 이른 아침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장수 깃대 두 대가 동시에 쓰러졌다. 모두가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선생은 이 같은 징조는 피할 수 없는 사정이니 ‘소란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무렵 일본군이 죽장면 입암에 도착하였다는 척후의 보고가 있었으며 일본군이 입암에 유숙할 것을 예측하였다.

선생은 곧 작전을 짰다. 부장 3명에게 각기 일대를 지휘하여 적의 길목을 지키면, 새벽에 본진이 적을 공격하여 섬멸한다는 작전이었다. 이에 따라 우재룡을 작령(雀嶺)으로, 김일언을 조암(?巖)으로, 이세기를 광천(廣川)으로 나가 매복하게 하였다. 선생은 내일 9월 2일 새벽 본진이 습격하면 적들이 도주할 것이다. 그 때 복병들이 길목을 막으면 ‘일본군 전체를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세 부대를 매복지로 내보내고 새벽을 기다기로 하였다.

9월 1일(양10.7) 선생의 명을 받은 김일언ㆍ우재룡ㆍ이세기 세 부장은 각자 군사를 이끌고 목표 지점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세기가 입암리 뒷산을 지나던 중이었다. 마침 골짜기 개천에서 일본군의 저녁 준비를 위해 닭을 잡아 장만하는 고지기(庫直) 안도치(安道致)라는 인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일본군이 자신에게 저녁밥을 시켜놓고, 안동권씨 문중 회관 영모당(永慕堂) 대청에서 모두 누워 쉬고 있다는 것이다.

저녁 9시 30분경이었다. 이세기는 적병이 그리 많지 않다고 판단하고, 단숨에 작살을 낼 요량으로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주위에 잠복해 있던 일본군이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이세기 부대는 크게 당황하면서 오직 본진이 와 주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선생은 매현에서 9월 2일(양10.8) 새벽에 출격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암 방면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선생은 곧바로 본진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였다. 그믐밤이라서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겨우 입암리 전지에 도착하였다. 선생 부대는 총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개울을 따라 접근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모습이 어른 거리는 영모당을 향해 집중 공격을 했다. 한참을 사격한 뒤 반응이 없자 일본군이 모두 죽거나 도망간 것으로 판단하고, 물러나 입암서원(立岩書院) 근처 주막에 이르렀다. 본진은 늦게나마 저녁 식사를 하였다.

영모당에 있던 일본군 청송수비대는 이세기 부대와 교전을 벌인 뒤 선생의 본진이 들이 닥치자 마루 밑에 납작 엎드려 죽은 듯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참 뒤 의병들이 물러나자 이를 추격하여 일시에 공격하였다. 주막에서 기습을 당한 의병들은 어둠속에서 저항을 하였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를 ‘입암전투(立岩戰鬪)’라 한다. 여기서 선생은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핵심 장령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