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연도
▷ 유찬희 1884.08.08. ~ 1930.02.13.
▷ 유기석 1907.01.12. ~ 1980.11.27.
▷ 유기문 1910 ~ 미상
◆ 훈 격
▷ 유찬희 건국훈장 독립장 (2010년)
▷ 유기석 건국훈장 독립장 (2008년)
▷ 유기문 건국훈장 애족장 (2010년)
◆ 주요공적
▣ 유찬희
▷ 1919~1921년 대한국민회 활동 참여, 산하 국민회군 조직
▷ 1923년 동성노농공사 간사
▷ 1926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의식 고취 활동
▣ 유기석
▷ 1930년대 남화한인청년연맹활동
▷ 1932~1938년 일본군함 파괴 시도 등 의열투쟁
▷ 1943~1945년 중국 남경에서 광복군 초모 활동
▣ 유기문
▷ 1930년대 남화한인청년연맹활동
▷ 1931년 흑색공포단의 핵심단원
▷ 1932년 일본병력 등 실은 선박에 폭탄 투척
◆ 공적상세
▣ 유찬희
유찬희는 1915년 9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서 권사용(權思容)이 설립한 학교에 재직하면서 국치기념일(國恥記念日)을 당해 국자가 지역의 기독교 교회에서 30여 명의 동지들과 기념식을 거행하며, 서로 고국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는 등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2월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체로서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를 결성하고 재무부장(財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동년(同年)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상무총회(韓人商務總會) 부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6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총기 구입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8월 중국 연길현에서 대한국민회 참모장(參謀長)이 되었고 12월 이후 동회(同會) 재무부장(財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회는 북간도지역에서 가장 잘 정비된 독립군단체로 본부는 연길현 춘화향(春化鄕)에 있었으며, 회장은 구춘선(具春善)이었다. 1920년경 국민회는 의란구(依蘭溝)에도 총부를 두었으며, 총 8개의 지방회와 130개가 넘는 지회를 설치하고 한인사회의 자치와 독립군 활동 및 군자금 모집 등에 주력하였다. 회원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자였으나 후에 불교, 천도교, 공교회(孔敎會) 계통의 인물도 가담하였다. 대한국민회는 산하의 무장부대로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유찬희는 1921년 연길현 액목현(額穆縣)에 거주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식을 전달하고 배일청년단으로 활동하는 등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년(同年) 12월 이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중앙총회 참사(參事)가 되었으며, 1923년 12월 동지(同地)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동성노농공사(東省老農公司)의 간사(幹事)로 활동하였다. 1924년 국민위원회 국민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노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3.1운동 8주년 기념강연회를 주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유기석
1928년 3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재중국조선인무정부주의연맹(在中國朝鮮人無政府主義聯盟)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며, 1930년 봄 동지(同地)에서 연구단체 조선무정부주의간담회(朝鮮無政府主義懇談會)를 조직하였고 대한대독립당주비회(大韓大獨立黨籌備會) 기관지『한국(韓國)의 혈(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동년(同年) 4월 상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며, 1931년 무정부주의자 연구단체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上海事變) 이후에는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등 각종 항일단체에 가입하여 천진(天津) 일본총영사관 파괴 및 주중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 처단 등을 시도하였다. 1933년 7월 반일만(反日滿)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중호조연합회(中韓互助聯合會)를 결성하였고 1935년 상해한인청년연맹원(上海韓人靑年聯盟員) 엄순봉 등과 함께 친일 행위를 자행하던 상해조선인민회 간부와 옥관빈 등의 처단에 관계하였으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검거를 면하였다. 1938년 김구(金九)와 협력하여 일제의 국제적 지위를 실추시키기 위하여 상해의 영미(英美) 각 기관과 신문사 등에 대한 폭탄투척과 일본 군함 출운환(出雲丸)호 폭침(爆枕)을 시도하였고 1943~1945년 남경(南京)에서 한족동맹(韓族同盟)의 의장이자 광복군(光復軍) 징모 제3분처의 대장으로 초모활동(招募活動)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유기문
유기문은 1930년 개성(開城)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중국 북경(北京)으로 건너가 친형인 유기석(柳基石)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1930년 4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유기석, 유자명(柳子明), 장도선(張道善), 정해리(鄭海理) 등이 무정부주의 신사회(新社會) 건설을 목적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자 본 연맹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31년 11월 상해 프랑스 조계 포석로(鋪石路)의 백정기(白貞基) 숙소에서 무정부주의자의 무력 투쟁단체이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행동 단체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결성할 때 핵심 단원으로 가담하여 항일 무력활동을 전개하였다. 흑색공포단의 주요 활동은 천진(天津) 폭탄 의거와 육삼정(六三亭) 의거, 변절자에 대한 숙청 등이었다. 1932년 10월 유기석은 유자명 등과 운동자금 모집 방법을 협의한 후 북경으로 가서 폭탄을 입수하는 등 제반 준비를 갖춰 천진으로 돌아왔다. 동년 12월 16일 전이방(田理芳)은 천진 주재 일본총영사관 관저에 폭탄을 던져 건조물의 일부를 파괴하고, 유기문은 프랑스 조계 부두에 정박 중인 일본 기선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의 위력이 크지 않아 큰 손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의 활동과 더불어 1932년 의열투쟁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1935년 7월 흑색공포단원 엄순봉(嚴舜奉), 이규호(李圭虎) 등이 친일 조선인 상해거류민회장 이용로(李容魯)를 암살한 사건으로 구속되자, 이와 관련하여 유기문 외 14명이 불구속으로 모두 17명이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다. 이때 상해 거주자인 유기문 등은 폭발물 취체 벌칙 제1조 제9조, 치안유지법 위반에 해당하나 소재불명(所在不明)으로 기소 중지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