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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5월의 독립운동가] 장매성, 박옥련, 박현숙, 장경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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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4-29 11:19 조회3,2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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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도 및 훈격

 

     장매성 (1911~1993), 건국훈장 애족장 (1990)

     박옥련 (1914~2004), 건국훈장 애족장 (1990)

     박현숙 (1914~1981), 건국훈장 애족장 (1990)

     장경례 (1913~1997), 건국훈장 애족장 (1990)

 

 

공적상세

 

광주학생운동의 숨은주역, 여성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만들다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장매성(1911~1993), 박옥련(1914~2004), 박현숙(1914~1981), 장경례(1913~1997)선생을 2021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장매성, 박옥련, 박현숙, 장경례 선생은 1928년 소녀회를 결성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한 주요 인물들이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1030일 광주에서 출발한 기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개찰구에서 일본인 학생 3명이 광주여고보를 다니던 여학생들을 밀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본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을 꾸짖으면서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의 마찰이 생긴게 시작이다. 간헐적으로 벌어진 충돌은 113일 폭발하였으며 이후 조선총독부의 차별적이고 강경한 대응으로 여론이 악화되었다. 광주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7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 학생들은 긴급 체포했다.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처사에 한국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까지 강제 연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12월 초에 들어와 서울에서는 광주의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맹휴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는 학생비밀결사인 각 학교 독서회가 주도했다. 동맹휴학과 시위가 계속되자 조선총독부는 1213일에 조기방학을 단행했다. 이처럼, 11월 초순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학생시위는 12월에 이르러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학생시위의 전국화에 대해 동아일보는 민족차별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서 1930115일 서울에서 또다시 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시위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해 여학생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경찰은 1929121차 시위 당시 주동자들이 검거되고 경계가 엄중한 가운데 115일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나자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며 소요죄를 적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틀간 500여 명이 검거되었고 200여 명이 구류처분을 받았다. 사이토 총독은 예정된 일본행조차 연기했다.

 

이처럼 19301월에 일어난 서울 2차 시위는 서울 지역 여학생연합시위로 불릴 만큼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선 것이 특징이었다. 1월에 서울의 여학생들이 다시 불을 지핀 학생시위는 3월까지 전국에서 이어졌다. 1930년 봄까지 이어진 광주학생운동에는 북으로는 함북 회령, 남으로는 전남 제주까지 전국 13도에서 280여개 학교가 참여했다.

 

192811월 초순 광주여고에 다니던 장매성이 주동이 되어 같은 학교의 박옥련, 고순례, 장경례, 암성금자, 남협협 등과 함께 광주사범학교 뒷언덕에 올라 소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장매성은 여성을 남성의 억압에서부터, 또 무산대중을 자본계급의 억압에서부터 각각 해방함으로써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제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 말에 모두 찬성하면서 소녀회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295월에는 장매성의 집에서 박계남, 박채희, 박현숙, 김금연, 김귀선이 소녀회에 가입했다. 소녀회원들은 매월 10전씩의 회비를 내어 사회과학 잡지와 서적을 구입해 읽고 토론했다. 그들은 여성을 남성의 압박에서, 한국인을 일본의 압박에서, 무산대중을 자본계급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취지, 즉 여성 해방, 민족 해방, 계급 해방을 지향하고 있었다.

소녀회는 독서회중앙부 산하 독서회 회원들이 만든 연합 단체인 학생소비조합이 출범할 때 30원을 출자하는 등 남학생들의 주도하는 독서회와 연대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연대활동의 일환으로 1929113일 광주역 앞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간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소녀회원들은 붕대와 도포약을 가지고 뛰어와서 부상 학생을 구원하는 한편에 한 손에 두 개씩이나 물주전자를 들고 쫓아다니면서 열광적인 구호에 타는 목을 축여주는 활동을 펼쳤다.

 

113일의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이 있은 후 장재성 주도로 투쟁본부가 마련되었고 1112일 시위가 준비되었다. 장매성은 등사판으로 수천 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일을 맡았다. 이 인쇄물들은 1112일 시위날에 배포되었다.

193018일 개학과 동시에 2학기 시험을 치르게 된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에서는 구속 학생의 석방을 주장하며 시험을 거부하고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는 백지동맹사건이 일어났다.

 

115일 서울에서 여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난 날, 광주에서는 광주여고보 학생 12명이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중 이광춘을 제외한 11명은 소녀회 사건 연루자였다. 이 과정에서 가택수색이 이루어지면서 격문이 발견되어 압수되기도 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 여학생 연합시위가 발발하고 동시에 광주에서 여학생 12명이 검거되자, 이 초유의 사태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났다.

 

광주여고보 당국은 백지동맹사건과 학생 12명 검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자 강경 대응했다. 곧바로 학교 문을 닫고 최순덕을 비롯한 백지동맹 관련자들을 무기정학 처분하고 소녀회 및 백지동맹사건에 연루된 20여명 학생의 부형을 불러 퇴학을 종용했다. 결국 소녀회 관련자 중 고순례, 암성금자, 박현숙은 19301월에, 장매성, 박옥련, 박계남, 장경례, 남협협은 19303월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192910월에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간 김금연은 19302월에 퇴학했다. 김귀선은 19301월 초순에 군산고등여학교로 전학했으나 1월 중순에 검거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처럼 소녀회는 일본 경찰이 광주학생운동 관련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독서회가 드러나면서 함께 발각되었다. 소녀회 관련자 11명은 검거된 지 무려 9개월 만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3대 비밀결사로 불린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에 연루되어 검거된 170여 명의 학생들은 예심을 이유로 재판이 열리지 않은 채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예심 지연에 항의하며 감옥 안에서 여러 번 항의하는 집단행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심은 193071일에 종결되었고 다음날 남협협, 박채희, 장경례, 고순례가 보석으로 가석방되었다.

 

소녀회 사건은 193092910시 광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 재판은 광주지방법원이 생긴 이후 최초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이자 언론이 전조선학생사건이라고 부른 광주학생운동이 발단이 되어 발견된 비밀결사사건이므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아침부터 방청을 위해 사람들이 몰리자 재판부는 개정 5분 만에 검사의 요청에 따라 본건 사안은 공안을 방해할 염려가 있다며 방청은 물론 촬영도 금지하고 비공개로 진행했다. 심리를 일사천리로 끝난 후 검사는 치안유지법 제12항 위반 혐의로 장매성에게는 징역 2년을, 박옥련, 박계남, 고순례, 장경례, 암성금자, 남협협, 박채희, 박정숙, 김금연, 김귀순에게는 징역 1년을 구형했다. 다음날 변호사들은 보석원을 제출했다. 그러나 늑막염을 앓고 있는 장매성의 보석만 불허했다.

 

106일에 열린 1심 공판에서 검사의 구형대로 장매성은 징역 2년의 실형을 받았다. 장매성 외 10명의 여학생은 징역 1,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11명 전원 1심의 판결에 불복해 공소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장매성은 12개월 14일의 옥고를 치르고 1932122일에 가출옥했고 당시 광주고보생으로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정석규(鄭錫奎)1938년에 결혼했다. 그리고 광주여고보를 그만두어야 했던 소녀회 회원들은 해방 이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인 전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매성, 박옥련, 장경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고, 박현숙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