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1919년 임시정부 재무차장
ㅇ1919년 제2회 임시의정원 의원 및 상임위원회 내부위원
ㅇ백산상회를 통하여 임정에 자금조달
ㅇ1921년 국민대표회기성회 활동 및 중한호조사 결성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윤현진(尹顯振, 1892. 9.16.~1921. 9.17.)
선생을 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만성재(晩惺齋)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5세가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9년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깊이 있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선생은 22세가 되던 1914년 메이지(明治)대학을 입학한 이후 조선유학생 학우회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된 신아동맹당 당원으로서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1916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서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하였다.
3ㆍ1독립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1일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 국내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 조직, 독립신문 발기인 등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에 취임하여 살림을 책임지게 된다. 독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같은 해 9월 그동안의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는데, 선생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160여 명의 내빈이 참석하여 선생을 추모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