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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불교포커스] 몽양 여운형 선생 70주기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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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7-25 16:48 조회7,7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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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오후 7시부터 1시간 반 가량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0주기를 맞아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추모 강연회가 있었다. 이날 강연에는 100여 명이 모였고, 이부영 기념사업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강만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나서서 '평화통일시대에 다시 보는 몽양 여운형'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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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백범기념관에서 있었던 몽양 선생 70주기 추모식.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휴머니스트

보통 사람들은 ‘몽양 여운형’하면 일제 때 항일투쟁을 한 독립운동가 정도로 알고 있다. 좀 더 아는 사람은 그가 해방 직후 해방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일제를 대신할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좌우합작을 통하여 이루려는 활동을 하다가 암살을 당한 분 정도로 알고 있다.

이날 강연을 듣고, 백과사전 등에서 여운형 선생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여운형 선생은 경기도 양평 신원리에서 대대로 벼슬을 누리던 부잣집 양반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10대 중반까지 한문수업을 받다가 중단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을 다니던 중 맘에 들지를 않아, 흥화학교로 옮겨 공부를 하였다. 21세에 아버지가 죽어 상속을 받았는데, 맨 먼저 빚 받을 문서와 노비 관계의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종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살길을 마련해 주었으며, 혼인하지 않은 종들은 짝을 맺어 주었다. 이후 몽양은 평생 농민과 노동자를 사랑하면서 살았다. 여운형은 자신의 집에 학교를 세워 신교육 운동에 나서는가 하면 상동교회에 들어가 기독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14년 그는 상해로 가서,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서 서양학문을 익히고 상해에 망명해 있던 신규식 등과 교민단을 조직하여 그 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피압박민족의 사정을 설명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1918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조선의 독립청원서 2통을 건네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줄 것을 부탁하고,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했고, 장덕수를 일본으로 보내는 등 3.1운동을 기획 추진하였다. 3.1운동 이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의정원을 설치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임시의정원 의원 및 외무부 차장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임시정부 활동에는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런가 하면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하라(原敬) 총리 등 정부 요인들과 회담하면서 조선독립의 정당함을 주장했고,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의 대조선정책을 혹독히 비판하여 일본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20년 미국 국회의원 사절단 100여 명이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北京)을 시찰하는 동안 임시정부의 대표로 안창호와 함께 이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해서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한국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1923년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촉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고 3년 여 옥살이를 하고 나와 활동 무대를 국내로 옮기게 된다. 국내에서 활동을 하면서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활동을 하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게 된다. 그는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는데 그때 맹원이 1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또 비밀리에 농민동맹을 조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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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몽양 선생 추모 강연을 하고 있는 강만길 교수.

몽양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강만길 교수의 강연 중 주목할 만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몽양은 일본과 군사적으로 독립 투쟁을 하여 나라를 되찾는 것이 최선이 방책이지만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국내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획하여 박성환 등과 비밀조직을 만들고, 무정의 태항산 전투부대와 연결하여 국내에 진격하여 게릴라 활동을 할 계획을 세워서 추진하던 중 해방이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1944년에는 건국동맹을 만들고 나중에는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하게 되는데, 건국 준비를 하여 조선이 점령군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몽양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어서 이승만을 수반으로 삼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온건좌파의 대표격인 여운형는 온건우파의 대표격인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을 하여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좌익과 우익 세력을 배제한 세력들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런 노선에 대하여 미군정 초기에는 미국도 긍정적으로 보고 지원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죄익측은 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 강경파가 합당하여 남로당 결성을 추진하고, 미군정청은 박헌영, 이강국 등의 체포령을 내리고 대구에서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좌익 세력들은 좌우합작에서 이탈한다.

이런 좌우합작활동에 대하여 김구와 한독당은 전적으로 지지했으며, 신진당과 사회민주당, 민주주의독립전선 등과 32개 중도파 정치단체들이 지지하는 등 그 지지 기반이 결코 좁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하였고, 민족전선은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하였고, 합작위원회는 '고려공화국'을 내세우면서 3권분립을 주장했다. 합작위원회는 토지정책에서는 몰수, 매상, 무상분배를 내세웠다.

몽양은 해방공간에서 가장 앞선 중도 정치인이었으며 적극적인 평화통일 운동가였다. 통일 민족국가 수립주의자였던 여운형은 그 운동 과정에서 여러 번 테러를 당하다가 결국 1947년 7월 19일 서울의 혜화동 로터리에서 살해되었으나 아직까지도 그 배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여운형은 좌우합작 운동을 하면서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서 좌우합작운동의 의의를 강조하였고, 김일성도 '이남 공산당도 여운형을 후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강만길 교수는 여운형 선생의 평화통일과 민족통일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몽양이 추구했던 통일 국가의 초석과도 같은 6.15선언 이후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남북 철도 연결 노력 등 이런 남북 교류 협력이 지속되었다면 남북문제가 오늘날처럼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몽양 정신을 오늘에 살려 남북 화해 협력과 통일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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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서거 70주년이 되는 7월 18일 백범기념관에서 전국 각지에서 5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몽양 선생 추모식을 열었다.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는 이부영 회장.

이날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한 이부영 기념사업회장은 “냉전과 이념 대립의 시대가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시대상은 다름이 없다. 미국과 중국의 쟁패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으며 북한의 핵무장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막바지 단계로 치닫고 있다. 한 차례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을 치르고 64년 동안의 세계 최장의 정전시대로 세월을 허송했으면, 이제 남북 정권담당자들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만드는 것이 도리이다. 몽양선생님, 백범선생님, 안중근장군님, 이제 남북형제들이 사나워진 눈빛을 따뜻하게 돌아오도록 이끌어 주소서.”라고 추모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박근혜 집권 당시인 지난해에 몽양 70주기 기념사업 예산들을 신청했으나 대부분 삭감이 되어 뜻있는 행사들을 하지도 못하고, 몽양 기념관이 있는 양평군에서는 양평군 밖으로 나가서 벌이는 기념사업에는 양평군 차원에서 지원할 수 없다는 옹졸함을 보이고 있다.”고 날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어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빅유철 광복회장, 함세웅 항일독립운동단체회장 등이 추모사, 유족을 대표하여 여인영 회장의 유족인사도 있었으며, 추모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몽양선생은 누구 못지않은 독립투쟁과 해방된 나라에서 남북 분단을 막고 통일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평소 그의 사상과 활동들이 좌파적 성향을 띄어서 그런지 2008년에서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몽양선생 70주기를 맞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몽양은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지주 가문의 후예로서 많은 토지와 노비들을 상속받았지만 그들을 다 해방시켜 누구보다 앞서서 자유와 평등을 몸소 실천한 선각자였다. 그의 성향을 굳이 따진다면 중도좌파에 해당하는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겠지만, 우익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를 하고, 사상적으로 막힘이 없었던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행방 직후 미군정청이 조사한 설문 결과, 당시 해방된 남북 민중들의 지지도에서 몽양이 33%이고, 이승만이 22%, 김구가 19%인 것을 보면 몽양이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존경받는 지도자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설문에서 해방된 나라의 정치 제도로서는 자본주의가 13%, 공산주의가 7%, 사회주의가 78%로 대부분 민중들이 사회주의를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양반이나 지주 계급, 일제 때 친일 세력 등 일부 계층에게 토지가 편중되어 있어, 이 토지를 몰수를 하여 무상으로 배분하겠다는 사회주의 계열 정당 등의 정책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몽양 정신은 오늘날 대결 국면의 남북문제를 풀어내는 지혜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제 때의 독립운동 과정이나 해방 정국에서의 그의 사상적 행보를 보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넘나들었다. 어찌 보면 그의 사상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일에는 좌우를 넘나드는 경계인이었다는 평가가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는 좌우를 넘나들며 폭넓은 교류를 통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조직활동가로서 3.1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는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에 능통하고 외교적 수완 또한 대단하였다.
또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무장투쟁과 교육, 외교 등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무장투쟁을 선호하였다. 해방 직전에 국내에 게릴라를 침투시켜 항일 투쟁을 계획했지만 이를 실천하기도 전에 해방이 되어 허사가 되었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강만길 선생은 이야기한다.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는 독일의 점령을 받았지만 레지스탕스가 국내에서 항독 게릴라전을 펼침으로써 독일 패망 이후에 당당하게 연합국 일원의 자격으로 독립을 쟁취하여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몽양은 이런 앞날을 예견하여 박성환 등을 통하여 게릴라 활동을 계획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이 되어 아쉽다.”

몽양 서거 70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정치적 노선을 보면서 오늘날 남북으로 분단되어 대결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몽양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국가를 이루고, 외세를 배척하려했던 정신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일 정도의 식견이었다. 해방 이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6.15선언이 있기까지 극한 대립을 해온 우리 민족은 다시 몽양의 정신을 살려 남북이 화해, 협력, 상생하면서 평화의 길을 가면서 더디 가도 좋으니 극한적 대립을 막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촛불 혁명의 정신이라 믿으며,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이런 촛불 정신을 잘 계승하여 몽양 선생을 배우고, 6.15와 10.4의 정신을 계승해 꽉 막혀있는 남북 관계의 숨통을 트고, 대화로서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