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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뉴시스] '충주의 사위' 몽양 여운형과 충북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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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7-19 10:19 조회8,1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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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몽양 여운형이 암살된 지 19일로 꼭 70년이 됐다. 사진은 1946년 4월16일 충북 충주 출신 부인 진상하씨와 함께 찍은 환갑 기념 사진. 2017.07.19.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photo@newsis.com
 

'충주의 사위' 몽양 여운형과 충북 인연


19일 피살 70주기···처가 충주 노은면 보련골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위원장을 맡았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이 암살된 지 19일로 꼭 70년이 됐다.

몽양은 1947년 7월19일 오후 1시께 서울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서 총탄 2발을 맞고 서거했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1등)을 추서받은 몽양은 경기 양평 출신이자 충북 충주가 처가다.

14살 때 유세영의 장녀와 혼인했으나 4년 만에 사별하고 충주 노은면 연하리 보련골 출신 진상하(陳相夏·1885~?)씨와 재혼해 슬하에 3남3녀를 뒀다.

독립운동가이자 비운의 정치가인 몽양은 현대사를 이끈 충북 출신 인물들과 인연이 적잖다.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우근 류자명(1894~1985)이다.

충주 대소원면 출신 류자명은 충주에서 3·1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일제 경찰에 사전 탐지돼 실패로 돌아간 뒤 1919년 6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몽양의 소개로 신한청년당의 비서로 활동했다.

신한청년당은 몽양이 신채호, 김규식 등과 함께 조직한 국외 독립운동단체였다.

몽양의 처가인 노은면 보련골은 류자명 누나의 시댁이다.

몽양은 처가 동네 출신 마라토너 정상희(1907~1981·전 국회의원)의 활동자금을 지원했고, 충주 출신 '한국 마라톤의 개척자' 권태하(1906~1971)가 해방 후 조선체육회 부회장이 됐을 때 몽양은 회장을 맡았다.

몽양은 처가인 충주와 이처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김희찬(비영리단체 아이들의 하늘 주비위원회 간사)씨는 "몽양은 충북의 노은(충주) 처가 동네 사람들과 깊은 연을 맺었다"며 "몽양과 처가 쪽 출신 인물들과의 인연 핵심고리엔 류자명 선생이 있다"고 말했다.

몽양은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인 옥천 출신 조동호(1892~1954)와도 인연이 깊다.

몽양과 조동호는 경성측량학교에서 만나 평생지기 동반자가 됐다.

몽양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문한 조동호는 상하이로 건너가 몽양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에도 참여했다.

증평 출신 독립운동가 연병호(1894~1963)와도 인연이 있다.

1922년 7월 몽양은 연병호, 안창호, 신익희, 이시영, 조소앙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를 주도한 인물들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했다.

광복 후에는 신흥 소도시인 증평에도 자취를 남겼다.

송기민 전 증평문화원장은 "몽양 선생은 선친 삼형제와 친분이 있었고 나도 서울 계동 집으로 세배를 간 적이 있다"며 "선생은 소방차를 타고 와서 네거리(현 증평군청 앞 사거리)에서 연설했다"고 회고했다.

송 전 원장은 몽양이 증평을 방문한 때를 광복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오후로 기억했다.

이날은 몽양이 건준 위원장을 맡아 휘문중 운동장에서 연설을 한 직후다.

연설 도중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거짓 소문이 나돌면서 연설이 중단됐고 직후 소방차를 타고 증평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광복 직후의 급박한 정국에서도 몽양이 지방의 한 작은 지역에 급히 내려온 사정은 무엇일까.

송 전 원장은 "선친 삼형제는 일제강점기에 몽양에게 자금을 지원한 적이 있고 이때도 정치자금 모금 차 와서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회고했다.

광복 이후 '최초의 정치단체',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으로 8월 말까지 전국에 140여 개 지부가 설립된 건준을 이끌어 가는 데 적잖은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ksw64@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