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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BBS 불교방송] [뉴스파노라마 삼일절특집] 김경집 교수 “3.1운동 동참사찰 수십곳 넘어...종단 차원 근대불교연구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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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3-01 21:18 조회1,08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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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배재수 보도국 사회부장
■ 출연: 김경집(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인천시 문화재 전문위원)
■ 프로그램: BBS뉴스파노라마 [삼일절기획] 근대 항일불교운동의 성과와 전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배재수입니다. BBS 뉴스파노라마 3월 1일 화요일 순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제103주년 3.1절입니다.

3.1절은 일제 치하 국권 회복과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했던 옛 선조들의 정신을 오늘의 되새기기 위한 날인데요, 하지만 올해도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선조들의 이 같은 고귀한 희생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가 대거 취소되거나 축소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한민국에서 누리는 행복과 자유 일제 치하 당시 옛 선조들의 굽히지 않았던 항일투쟁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당시 항일운동의 중심에는 불교계에 뛰어난 선각자 스님들과 이름 없이 숨져간 수많은 불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는데요,
뉴스파노라마 오늘은 3.1절 특집으로 ‘근대 항일불교운동의 성과와 전망’을 주제로 김경집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배재수 앵커]
뉴스파노라마 오늘은 3.1절을 맞아 특집으로 근대 항일불교운동의 성과와 전망을 주제로 전문 학자분과 자세히 짚어보는 시간 갖겠습니다. 인천시 문화재 전문위원이기도 하고요, 한국 근대사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다양한 논문을 쓰신 석학이십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김경집 교수님 모셨습니다. 직접 스튜디오에 나와주셨는데요, 어서 오십시오 교수님.

[김경집 교수]
안녕하세요. 김경집입니다.

[배재수 앵커]
코로나19가 엄중한 상황인데 이렇게 직접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경집 교수]
별 말씀을 아주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재수 앵커]
제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이 이제 103주년 31절입니다. 관련 연구를 하신 학자로서 감회가 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오늘날의 3.1절의 의미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경집 교수]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운동이 독립운동이죠. 그런데 이 당시에 3.1운동을 주최하신 분들이 종교인이거든요, 그리고 이제 종교인은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제 시민이고 그래서 일제와 같은 그런 압제에 저항하는 시민혁명운동이 아닐까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3.1운동의 핵심은 왕실이나 귀족의 그런 정치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상실한 주권을 시민이 찾으려고 했던 운동으로서의 그 가치가 상당히 아주 높은 그런 우리 근대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시민의식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던 그런 운동으로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배재수 앵커]
‘시민혁명운동’ 아주 적절한 표현이신 것 같고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서 당시 항일운동의 흐름과 또 여기서 불교계가 차지했던 역할과 위상부터 짚어주시겠습니까

[김경집 교수]
3.1운동의 민족 대표분이 33분이시거든요. 그래서 그걸 종교적으로 분리를 해보면 천도교가 15분 개신교가 16분 우리 불교가 두 분 이렇게 하다 보니까 많은 불자들이 우리가 좀 참여가 저조한 것 아니냐 이렇게 보시는데 그건 이렇게 보시면 안 되고요, 개신교가 요즘 들어와서 굉장히 숫자적인 그걸 가지고 자기네들이 기여도가 제일 높다라고 얘기하시는 분이 간혹 있거든요. 3.1운동은 사실 이제 천도교가 주도한 게 맞고요, 이 당시에 천도교회 교세가 개신교회 교세를 능가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다음에 이제 우리 불교계가 지지 기반이 굉장히 많고 전국적인 분포이다 보니까 천도교가 우리 불교계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렇게 권하게 된 거죠. 그러면 왜 이제 우리 불교계에서는 두 분만 참여를 하셨느냐 이게 시대적인 배경을 우리가 좀 알아야 돼요. 개신교 같은 경우에는 선교 활동이 들어오면서 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까 당시에 서울 이곳에 교회가 좀 많았고요, 우리 이제 불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다 지방에 있었단 말이에요.

[배재수 앵커]
그렇죠, 지방 산중에.

[김경집 교수]
1912년 임재종 경성포교당이 세워지면서 용성 스님이 처음 올라왔을 때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서울에는 온통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는데 우리는 이거 하나다라는 거죠. 12년도니까 그때 이제 지금 조계사 옆에 전에 있었던 각황사 그 다음에 경성 포교당 이 두 곳 밖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참여할 수 있는 분들에게 인편으로 이렇게 연락을 보내야 되는데 이게 극비사항이잖아요. 그러니까 인편을 보내야 되는데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기서 부산 가는데 지금은 뭐 3시간 반이면 가지만 그때는 15시간 20시간도 걸렸단 말이에요. 그럼 가서 확인하고 올라와야 되잖아요. 이런 어떠한 교통과 통신의 불편 때문에 우리가 저조했지 그 뒤에 항일운동에 참여하셨던 분들을 이렇게 보면 이분들에게 미리 연락이 갔고 아마 동의를 얻었다면 우리도 10여 명이 넘는 분들이 아마 대표로 이렇게 참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봅니다.
우리가 그런 흐름을 봤을 때는 천도교가 불교 개신교 이런 종교단체와 함께 그런 어떠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큰 그림을 그리실 때 우리 불교계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라고 이렇게 천도교에서는 보셨다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

[배재수 앵커]
민족대표 33인에는 이제 참여하는 수는 적지만 일당 백의 불교계의 위상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항일운동의 선두에는 단연 불교 지도자들의 활약이 컸는데요, 주역으로 활동하셨던 분들을 살펴보면 가장 손에 꼽을 수 있는 분이 이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만해 한용운 스님 아니겠습니까? 출가 수행자셨고요 또 독립운동가셨고 그리고 또 우리 문학사의 길이 남을 빛나는 글을 남긴 시인이기도 하셨죠. 한용운 스님 좀 짚어주시죠.

[김경집 교수]
이분이 지금 충청도 홍주분이셔요. 그래서 이제 거기서 이제 한학을 공부하시고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 1900년 초반에 블라디보스톡이라든지 그 다음에 만주 지역이라든지 이런 쪽을 쭉 이렇게 세상을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이렇게 만행을 하시죠. 그러다가 이제 1905년 무렵에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 백담사로 출발을 하시는 거죠. 우리가 이제 시인으로 이렇게 많이 알려져 있거든요. ‘님의 침묵’이라든지 많은 시를 쓰셨기 때문에 사실 이분은 소설가이기도 해요. 그래서 조선일보의 ‘흑풍’이라고 하는 소설도 게재를 하셨고 그래서 문학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우리 근대문학에서는 위치에 상당히 높게 올라와 있죠. 그래서 만해 한용운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보게 되면 국문학 쪽에서 제일 먼저 시작을 했다라고 보셔도 돼요.
왜 그러냐면 우리 불교학계 쪽에서는 사실 이분에 대해서 평가가 조금 애매한 적이 좀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국문학 쪽에서 이 문학적 작품을 가지고서 많은 조명이 있었고, 이제 들어와서 이제 만해스님에 대한 평가가 이제 바뀌어지게 된 거죠. 왜 그러냐면 이분의 역할이 스님이시면서 불교 개혁 쪽에도 많은 역할을 하셨지만 예 독립운동가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분이 이제 하신 게 33인 중에 대표이시기도 하지만 그 다음에 우리나라 20년대 후반쯤 가면 좌우 합작이 돼가지고서 우리가 이 조직했던 것이 신간회인데 신간회의 여러 지회 가운데 경성지회장을 해요. 한 6개월 정도 하셔가지고서 뭐 좀 짧게 끝났지만 그 뒤에도 이제 어떠한 항일운동에 대해서 끊임없는 어떤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이런 쪽에서는 이제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분명히 크죠. 위상이 그리고 이분이 이 당시에 교류했던 인사들을 보게 되면 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다 이렇게 교류를 하시면서 그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상당히 사회운동에 있어서는 큰 역할을 하셨고 그다음에 이제 우리 불교학 쪽으로 보시면 우리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불교유신론’ 이게 이제 1913년에 출간을 했거든요, 1910년에 탈고를 해서 그러니까 이게 유신론 나온 지가 100년이 넘었단 말이에요. 사실은 2013년도에 한 번 이 유신론을 가지고 우리가 크게 조명을 해야 되는 이 학술대회도 하고 좀 했었어야 되는데 그냥 좀 넘어간 적이 있거든요. 그 다음에 우리가 이제 모르시지만 이분이 포교에 대해서 굉장히 열정을 가졌었던 분이에요. 그래서 처음 이분에 의해서 출판된 게 ‘불교 대전’이죠. 그러니까 대장경 가운데 핵심적인 것들만 이렇게 요약을 해서 교리적으로 편찬한 것이 ‘불교 대전’이고. 그다음에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이제 건봉사 본말사지라든지 이런 사지 편찬 이런 역할들을 하셨던 이런 분이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문화 그 다음에 독립 그 다음에 불교 개혁 이 세 분야에 아마 가장 많은 공헌을 하신 그런 분이 아닐까 이렇게 평가를 할 수가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저희가 이제 만해스님과 관련된 내용은 이제 몇 차례 특집을 통해서 또 전해드리기도 했었고요, 짧은 시간 내에 이제 이분을 다 설명드리기에는 시간이 좀 부족하죠.
또 이제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꼽히시는 분이 이제 만해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을 올렸던 백용성 스님 아니겠습니까? 용성 스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김경집 교수]
이분도 이제 33인의 한 분으로서 이렇게 많은 조명을 해오고 또 이분에 대해서도 우리가 뒤늦게 우리가 이제 그런 연구를 좀 뒤늦게 하기 시작을 했는데 그거는 이제 나중에 또 드릴 말씀이 있겠지만 우리 한국불교계에서 근대불교에 이렇게 관심을 갖기 시작을 한 게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이분이 많은 역할을 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만 되어 오다가 본격적으로 이분의 이제 대각회 문도회에서 대각사상을 이렇게 설립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추진을 하면서 이제 연구가 됐죠. 그래서 이분이 처음에 이제 14세에 출가를 했다가 부모님의 반대로 잠시 이제 고향으로 가셨다가 16세에 이제 해인사로 출가를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사찰을 이렇게 다니시면서 공부를 하시다가 어디서 이분이 확철대오를 하시냐면 파주 가면 보광사라고 있습니다 고령산 보광사. 그 위에 이제 한 10여 분쯤 올라가면 산내 암자인 도솔암이 있어요. 그 현판은 이제 우리 권상로 스님이 쓰셨는데 여기서 두 번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을 다니시면서 보임 기간에 또 한 두 번을 깨달으셔갖고 한 네 번 정도 이렇게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 본격적으로 불교 활동을 하신 것은 1912년이에요. 범어사에 계시다가 이제 원종이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일본 조동종하고 맹약을 맺으려고 하니까 이게 잘못됐다 해가지고 한국의 전통성을 회복을 해야 된다 선종에. 그래서 임제선을 표방한 임제종이 설립이 되거든요. 그때 이제 임제종 회의가 송광사에서 처음 열렸는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할 때는 범어사의 종무소를 둬야 그래가지고 초량 대구 경성 이런 대구 이런 등지의 포교당을 일단 네 곳을 세웁니다.

[배재수 앵커]
임제종 포교당이요?

[김경집 교수]
네, 임제종 경성포고당, 임제종 대구 포교당, 초량 포교당 뭐 이렇게 되겠죠. 그랬을 때 이제 이 경성포교당에 이제 1912년 우리 용성 스님이 올라오시는 거예요. 올라와서 보니까 온 천지가 다 교회 종소리라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교회가 도심을 중심으로 해서 선교 활동을 했기 때문에 도심에 많은 거고요, 우리 사찰은 사실은 도성 출입이 어려웠잖아요.

[배재수 앵커]
그렇죠 조선시대 때

[김경집 교수]
그러다 보니까 다 외곽으로 나가고 또 뭐 경의 신라나 고려시대 때도 아마 우리가 수행이라고 하는 이러한 우리 불교적인 특징 때문에 사실은 산 속에 많이 세워지고 그러다 보니까 도심 포교를 해야 될 곳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이제 도심 가까이 이게 도성 출입 금지가 진짜 오랫동안 지속이 된 거예요. 세종 때 시작을 해갖고 1895년에 끝나니까 그래서 이제 1895년 도성 출입금지가 끝나니까 이제 막 세워진 사찰이 어디냐면 동대문 밖에 지금 창신초등학교야 거기에 원각사를 세우거든요. 대한제국 때 그래가지고 일본 불교가 너무 많이 들어오니까 특히 이제 일본 정토 계열이 너무 많이 들어오니까 이들하고 좀 한국불교를 좀 지켜야 되겠다 해서 대한제국이 의도적으로 세운 데가 이 원흥사거든요. 그리고 이제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기 위해서 사사관리서라는 이러한 정부 부서도 두고 그런데 그게 동대문 바뀌잖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못 들어온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나중에 1910년 안 되겠다.
우리가 그래도 도심에 포교를 해야 되겠다 해서 1910년 저 수송동에 집을 매입을 해갖고 세운 게 각황사라는 절이죠. 1910년 도성 안에 처음. 세워진 절이 각황사에요. 그 다음에 이제 천구백십이 년 경성 포교당이 세워지면서 어떻게 보면 넓게 서울이라는 지역을 보게 되면 세 곳 정도밖에 없었죠. 그러니 교회 수십 군데라든지 이런 거 하고 비교해 봤을 때는 우리의 차이가 있는데 이분이 이제 이렇게 들어오셔서 활동을 좀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1919년 3.1운동의 대표로 참여를 하시죠. 용성 스님이 참여하실 수 있었던 건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1912년 임제종 경성포교당으로 이제 맡아서 오셨는데 임제정이 1912년 6월 해체가 돼요. 해체가 되는 이유가 1912년 이제 한일 합방이 되고 나서 총독부가 1911년 유월에 한국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편제를 33본산으로 체제를 바꿉니다. 그 기본안이 이제 6월에 제정이 된 사찰령이고 30본산으로 편제를 하겠다는 것이 이제 9월에 발표된 시행규칙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그러한 조치에 의해서 임제종이 해체가 되니까 이분이 지금 봉익동, 종로구 봉익동에 가옥을 하나 매입을 해갖고 대각사라는 이름을 붙여요. 그래서 그게 아마 이제 한 1916년 정도 되는데 이때부터 이제 그 봉익동에서 대각회 활동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당시 그러면 이제 만해 한용운은 어디 있었느냐, 이 주변에 있으니까 서울에 있으니까 이분하고 연락이 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가서 지금 천도교에서 이런 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최일이 나한테 와가지고 불교에도 참여했으면 좋겠다 얘기를 하니까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니까 그때 인감을 탁 주면서 우리 용운스님이 마음대로 하시라고 그러니까 이제 가까이 계셨으니까 참여가 된 거죠. 근데 뒤에 이종욱 스님이라든지 박한영 스님이라든지 백초월 스님들은 다 지방에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33인을 우리가 모집을 할 때 이게 대놓고 모집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배재수 앵커]
그렇겠네요.

[김경집 교수]
그럼요. 그러다 보니까 이 불교계 참여가 좀 적은 거지 뭐 우리가 몰라서 적게 참여한 것은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이분이 하고 21년에 이제 출옥을 하시고서 이제 삼장역회라는 것을 만드시죠 이게 또 중요한 게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서 계시다 보니까 이제 거기 같이 운동을 하셨던 계신 게 목사님들 오셨고 이 양반들이 성경을 읽다 보니 걸 이렇게 옆에서 이제 보시다 보니까 뭐예요. 다 한글로 돼 있는 거예요. 야 이거 우리 불교계도 한문으로 된 경전을 저렇게 번역을 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제 출소하시자마자 삼장역회라는 곳을 두셔가지고 아주 중요한 경전들을 이렇게 번역을 하신 이 활동을 좀 하시게 되죠.

[배재수 앵커]
또 다른 선구자분이 이제 서울 진관사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던 백초월 스님 아니겠습니까? 진관사 태극기, 남다른 사연으로 좀 유명한데요? 백초월 스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김경집 교수]
그분은 중앙학림이죠. 우리가 맨 처음에 명진학교에서 불교 사범학교, 불교 고등강숙 그러다가 중앙학림으로 되는데 1916년에 중앙학림의 교장을 하셔요, 그래서 이분이 한국민단이라고 하는 단체를 조직을 하시는데 이게 이제 19년 1919년 4월이에요. 그러니까 3.1운동 지나고 나서 이분이 그런 일제의 항일 운동을 생각을 하셨던 거죠. 그래서 혁신 공부라고 하는 이런 10분도 발행을 하시고 인재들을 뽑아가지고 이제 길림성의 독립군으로 이렇게 파견도 하시고 그런데 이제 1919년 이분이 진관사에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왜 계셨는가 했더니 이 진관사에서 포교 활동을 하실 때 백초월 스님이 하신 거예요. 근데 이제 1919년 가을쯤에, 이제 왜 이게 가을이라고 여겨지느냐 하면, 이때 발견된 신문들이 그 인근 11월 달쯤에서 발간된 신문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 이제 진관사에서 이런 포교 활동을 하시는데 포교 활동 하시면 젊은이도 있고 뭐 불교 신자도 많겠지만 불교만 얘기하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민족의식도 고취하고 그러다 보니까 일제의 어떤 불시 검문이 오니까 갖고 있었던 걸 이것을 어디다 숨겨야 되는데 이제 칠성각 불단 뒤에다가 숨긴 거죠.
그래가지고 다 지금 몰랐는데 2009년이죠. 칠성각을 해체해서 복원을 해야 되는데 뜯다 보니까 그게 나온 거죠. 근데 더 이제 재미나는 건 이 태극기가 일장기 위에다 그려졌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보게 되면 우리는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릴 수 있지만 일장기는 태극기 위에 그려질 수가 없거든요.

[배재수 앵커]
그렇죠

[김경집 교수]
아, 이게 역시 독립은 될 것 같구나 라는 이런 생각들도 이제 좀 들어보고요, 그래서 이게 태극기가 2010년도 2월 달에 등록 문화제가 돼 있는데, 백초월 스님은 그 뒤에도 이렇게 항일 운동을 하시다가 옥사를 하시죠, 그래서 참 이분도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우리가 그 행적을 쭉 따라가시면 좋고. 이분이 이제 포교 활동을 하신 것은 청주에도 그 도심에 있는 용화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이제 포교 활동을 하시면서 청주에 있었던 이영재라는 분이 거기서 듣고 청년 운동을 하죠. 그래서 이 분이 ‘조선불교혁신론’이라고 하는 글을 써요 1922년에. 조선일보의 22번에 걸쳐서 연제가 되고 1927년에 일본에서 이제 동경대학을 마치시고 인도로 유학 가시겠다고 해서 출발하셨다가 스리랑카에서 풍토병에 걸리셔서 거기서 돌아가시는 그런 비운의 청년 운동을 하셨던 분이 이영재라는 분인데 .

[배재수 앵커]
이분이 쓰셨던 거는 조선불교혁신론이군요.

[김경집 교수]
그러니까 조선불교유신론, 조선불교혁신론 그 다음에 권상로라는 분이 조선불교개혁론 이런 데가 10년도 20년도에 나오는 이유가 이 당시에 우리 불교계의 모티브 슬로건이 개혁이라는 그런 콘셉트가 있지 않았나 이렇게 보여지기도 합니다.

[배재수 앵커]
네, 선각자 스님 한 분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봉선사에서 출가하셨던 태어 스님 임시정부 국무위원까지 지내셨던 분인데, 운암 김성숙 선생님이시죠?

[김경집 교수]
이분은 지금 아마 후손들에 의해서 그런 연구 활동이 많이 되고 그러니까 간략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경기도 용문사에서 출가를 하시는데 1916년에. 그때가 18살이신 것 같아요.
봉선사에서 이제 본사니까 공부를 쭉 하셨고 1919년에 3.1운동 이후에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를 두고 거기에 격문을 만들어서 뿌려요. 21살 때. 지금으로 보면 참 용감하시기도 하고 대단히 이런 선지적인 안목도 있으셨던 것 같고 그래서 이제 쫓기는 입장이 되다보니까 중국으로 건너가시죠 거기서 의열단 활동이라든지 조선민족 해방 운동이라든지 조선민족 전선 연맹 등에서 이제 활약을 하시다가 임시 정부가 이제 중경으로 옮겨갈 때 거기에 가셔가지고 선전위원 국무위원 이렇게 참여를 하셔가지고 독립운동을 하셨고 귀국 후에는 1961년 여러분 잘 아시는 이제 신민당 우리는 대표적인, 어떤 보게 되면 이제 야당의 명칭이었죠. 신민당에 이제 참여를 하셔서 창당에 운영위원 지도위원 이런 역할들을 하셨던 스님이시면서 이제 정치 역할을 많이 하셨던 그런 선각자 중에 한 분이십니다.


[배재수 앵커]
네, 이 밖에도 이제 비구니 스님과 뭐 청년 제가 불자들의 활약도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이 부분도 좀 연구하신 내용이 있으시면 좀 소개해 주시죠?

[김경집 교수]
1919년 3.1운동 전이죠. 1907년에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라는 게 있습니다. 나라 경제가 어려우니까 일제에 많은 돈을 빌려 썼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담배도 끊고 술도 줄이고 돈을 모아서 일제한테 빌린 돈을 갚자. 이럴 때 이제 여기에 참여하셔서 기금을 내시는 문수스님이라든지 이런 분들이 비구니 스님이죠. 그 다음에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1919년 3월 1일 한 해 앞서서 일어난 게 있죠. 1918년에 이제 제주 법정사에서 항일운동을 할 때
이때 이제 관음사를 참관한 봉려관 비구니 스님이 항일운동에 많은 후원을 하셨고 그 뒤에 그런 걸 했는데 아무래도 이 당시에 이제 비구니 교단이 확실하게 있지 않다보니까 아마 교단 차원에서 비구니 중심으로 해서 단체적인 활동은 좀 드물고요. 이렇게 개별적인 활동은 여러 사례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 청년 운동들은 역시 중앙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됐죠. 그때 신상원 백성우 김범림 박민호 이분들은 사실은 이제 재가불자로 봐야 되느냐 승려로 봐야 되느냐 학교를 다닐 때 승려로 계시다가 나중에 이제 광복 이후에는 이렇게 이제 교육계 활동을 하실 때는 이제 제가 불자로 환속을 하셔갖고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이 당시에 이렇게 운동을 하실 수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사찰에서 사비를 받으셔가지고 공부하러 오신 분들이 좀 많고요. 아닌 분들 같은 데는 이제 박민호 이분은 이제 중앙고보를 나오셔가지고 많은 역할을 하셨는데 이런 분들이 청년 재가불자로서 활동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우리가 이제 대체로 3.1운동 선언하면 이제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했던 독립선언서를 이제 떠올리게 되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또 약 7천 명에 달하는 스님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도 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얘기해 주시죠?

[김경집 교수]
이거는 이제 7천여 명의 스님이 이 당시에 이제 한국의 스님들의 숫자가 한 6천 명 이런 정도 되거든요. 이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하면 1919년 11월에 대한승려 연합회 선언문이라는 것이 이제 상의 독립신문판에 발표가 돼요. 발표된 지면은 1920년 3월 1일 자인데 불교 선언서로 그래서 이거는 이제 12명의 대표가 선언서를 발표할 때 칠천 승려의 어떤 의견이다. 이렇게 발표를 하신 거죠. 이제 7천여 명의 스님이 다 동참하신 건 아니고 그렇지만 우리 불교계가 그래도 1919년 그런 의지가 있었고 그런 선언서를 발표할 만큼 상당히 의욕적으로 항일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라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죠.

[배재수 앵커]
이 당시에도 사찰에서 만세 운동도 있었다고 제가 들었는데요, 사찰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표적인 만세 운동 몇 곳 좀 있으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경집 교수]
지금 일어났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는 곳은 한 16곳 정도 돼요. 봉선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표충사 동화사 도리사 석왕사 근데 이제 그 외에도 사실은 우리 불교계가 좀 아쉬운 게 기록이 좀 부재해요. 그러다 보니까 이런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아마 수십 군데가 그런 3.1운동에 동참한 사찰로 우리가 기억을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배재수 앵커]
이처럼 불교계 항일 운동이 거셌지만 후대에 크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교수님께서 지적을 하셨지만 그런데 이제 최근 들어서 이 불교계 항일 운동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조금 생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연구 흐름이 있고 움직임이 있는지 좀 전해주시죠?

[김경집 교수]
우리가 이제 2019년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3년간 이 관련을 우리가 조계종단에서 연구를 했어요. 국가적인 지원도 받고 그래서 많은 자료도 우리가 정리를 하고 지금까지 없었고 또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많이 이제 드러냈고 그래서 큰 의미가 있는데 제일 아쉬운 건 이제 일회성이라는 거죠. 한 번으로 끝나고 나서 2019년도에 이렇게 끝나고 나서는 어떤 교단적인 종단적인 차원에서 지금 하는 게 없거든요. 이게 이제 학교에다가 우리가 미룰 수도 없는 이유가 사실은 동국대라든지 위덕대라든지 금강대학이라든지 이제 불교학 대학을 있는데 우리가 이제 한국 불교 가운데에서 근대사를 전공하시는 분들이 거의 드물어요. 그리고 학부에서는 이 분야의 강좌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석사나 박사 과정 와야 한 번 정도 들을까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또 그렇다고 해서 불교학과가 근대사만 할 수는 없는 거거든요. 왜 그러냐면 교리도 해야죠, 여러 가지 지역사도 있죠. 그래서 이러한 문제가 종단 차원에서 조금 고민을 좀 해야 되거나 아니면 뜻 있는 우리 부자들 가운데서 좀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연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이게 불교학과 학계에서 연구하는 방향하고 일반 사학계에서 보는 방향하고 또 시각도 좀 차이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종단에 우리 대한불교조계종에 있는 불학연구소 그다음에 뭐 동국대학의 중앙연구소 많은 연구소가 있는데, 이런 관심을 좀 가져줬으면 좋겠고 저는 제일 좋은 방법은 기독교교단들이 이제 개신교 교단들이 하는 게 그거거든요. 기독교 역사 연구소처럼 우리 불교도 그런 근대불교 연구소를 좀 종단 차원에서 하셔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좀 해봅니다.

[배재수 앵커]
벌써 주어진 시간이 다 돼서요. 여러 가지 질문을 좀 드려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저희가 마련한 시간이 짧아서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못 다한 이야기하고요 방송 듣고 계신 청취자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해주시죠?

[김경집 교수]
예 마지막으로 이제 제가 생각하는 것은 뭐냐면 3.1운동에도 그렇고 그다음에 어느 국가 어느 종교도 그렇고 제일 중요한 건 인재 양성이에요. 우리 한국불교가 지금 어려운 시기 맞아가고 있다고 그러는데 이 어려운 시기를 우리가 돌파하려면 역시 끊임없는 인재 양성에 사부대중이 다 동참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좀 마지막으로 당부 드리면서 제 생각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배재수 앵커]
여기까지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교수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김경집 교수]
예, 감사합니다.

[배재수 앵커]
지금까지 김경집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님과 함께 근대 항일불교운동의 성과와 전망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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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BS NEWS 배재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