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수만발 탄환 배에 숨겨서... 왜적 맞선 독립군의 무장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8-06 10:20 조회6,742회

본문

노령 지역에서 무기 반입을 위해 독립군은 육로와 수로를 모두 이용했다.


군비단은 목선을 이용해 30~40정 정도 무기를 만주로 옮긴 뒤 운반대가 왕청

으로 반입했다.


의군부는 125정의 무기를 기선을 이용해 옮기려다 일본군에게 발각돼 성공하지

못했다. 수로는 목선으로 적은 무장을 옮기는 데 적합했다.

많은 무기를 산 독립군단은 운반대가 노령으로 가서 육로로 반입했다.


북로군정서와 국민회군이 대표적이다. 장기간의 힘든 운반이지만 독립전쟁의

첫걸음이라는 사명감에 고됨을 잊었다. 이우석은 이렇게 회고했다.

독립전쟁의 직접적 초석이 될 무기를 운반하고 있다는 사명감과 희열로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되었다.


일제 정보문서('구경 제24867호')는 노령에서의 육로 반입에 세 가지 길이 있다

고 했다.

첫째 오소리(烏蘇里) 연선 방면에서 국경 포구라니-치나야 부근으로 나와 국경

을 넘어 둔전영(屯田營) 또는 삼차구(三 口)를 경유하여 수분하원(綏芬河源)으로

거슬러 올라가 왕청현 오지 나자구로 반입한 것, 둘째 추풍 방면에서 동녕현의

국경 호포도하(胡布圖河) 연선이나 삼차구에서 국경을 넘어 대오사구에서 수류

를 따라 노흑산을 지나 나자구를 경유하여 훈춘현 대황구(大荒溝)나 왕청현

서대파(西大坡)로 반입한 것, 셋째 훈춘 국경 방면에서 주로 홍기하(紅旗河)의

상류 삼림 지대나 바라바시 쪽에서 교묘하게 국경 감시를 피하여 훈춘 오지로

반입한 것.

일제 문서는 둘째 경로로 많은 무기가 반입된다고 적었다. 북로군정서가 이용한

경로다. 중국 관헌을 만나면 무기를 빼앗길 수도 있어서 우회로를 택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래 걸렸다. 북로군정서 3개 운반대가 임무를 완수하는 데는 40일 안팎

이나 걸렸다. 거리가 더 먼 남만주의 독립군단은 노령에서의 무기 구매가 훨씬

어려웠다.


남만주는 무기 구매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제는 1920년 5~8월에 '중·일

합동수색대'를 동원해서 흥경, 유하, 해룡, 통화, 환인, 관전 등 남만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학살했다. 뒤에 있을 '경신 대학살의 전주곡'이었다.


노령에서 무기 구매 길이 열려 활발히 무기 반입이 이루어지는 때에 남만주 독립

군단은 왜적에 대처해야 했다. 근거지를 지키면서 노령에서 무기를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노령에서 구입하지는 못했지만 남만주의 독립군단도 무장을 위해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무장을 강화했다.


1919년 4월의 일제 문서('소밀제672호')에 따르면 쾌당모자(快當帽子)의 부민단은

총기 구매를 위해 분주해서 "대략 예정한 수를 얻었다"고 한다.


1919년 4월에 무장을 갖춘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무기 구매를 위해 노력하던 정황

정확하다.

1920년 10월의 일제 문서('기밀공제25호')는 한족회와 독립단 무기 현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한족회 : 노국제 보병총 90정, 동 자동식 60정, 미국제 보병총 16정, 동 윈체스터

            군용총 21정, 중국제 엽총 160정, 동 탄발식 권총 111정, 영국제 보병총

            14정, 동 자동식 권총 40정.
독립단 : 노국제 보병총 170정, 동 자동식 권총 230정, 영국제 보병총 16정,

            동 휴대 기관총 12정, 동 윈체스터 군용총 32정, 미국제 권총 22정,

            중국제 권총 49정.

총 종류로 보면, 한족회는 소총 201정, 엽총 160정, 권총 151정이고 독립단은 소총

218정, 권총 301정, 휴대 기관총 12정이다.


남만주는 밀정에 대한 보안 대처가 강해서 일제 정보문서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독립운동 근거지를 파괴하려는 일제가 침략 이유를 만들기 위해 무장을 부풀린 점

도 있을 것이다.

영사관 일경이 집안, 관전을 수색할 때 한족회, 독립단원 97명을 체포하면서 미국제

휴대 기관총 1정, 동 위체스터 군용총 1정, 노국제 보병총 1정, 영국제 자동권총 1정,

중국제 엽총 1정, 동 권총 1정 등 총 6정을 압수했다 한다('기밀공제25호'). 기초 무장

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위 통계처럼 1000정 이상을 보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 무장이면 일경

수색대가 습격할 때 한족회와 독립단이 항전력 보존을 위해 피신하지는 않았겠다.

독립단의 무장, 실제 시점은...

실제 독립단이 부대원을 무장시킬 정도로 많은 무기를 반입한 것은 10월 초다.


4월 초 김승학이 상해로 파견됐다. 그는 군기국장(軍機局長)으로서 무기 구매를

'독립군 성쇠'가 달린 것으로 중시했다.


240정과 수만 발 탄환을 이륭양행 배에 숨겨 관전현에 도착한 것이 9월 하순이었다.


그리고 10월 초 독립단 무장대오인 광복군사령부에 도착했다(김승학, <망명객행적록>).


남만주 독립군의 첫 대규모 무장이었다.

한족회, 곧 서로군정서는 대규모로 무기를 산 기록이 없다. 앞서 본대로 일제 정보

문서에 500정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건, 독립단의 실제 총기 구매 사례와 비추어

보아도 사실이 아니다.


1919년에 세 곳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총기훈련을 할 정도의 기초 무장은 되어 있었

지만, 부대원과 생도가 모두 무장할 정도로 많은 무기는 없었다. 일찍부터 교관을

무기구입 위원으로 길림과 노령에 파견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우선 노령에서 멀어서 반입이 어려웠다. 하지만 독립단이 먼

상해에서 구입해 온 점을 고려하면 지리적 요인은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둘째, 재정을 세 곳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집중했기 때문에 대규모 무기 구매가

어려웠다.


무기 구매의 난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 북로군정서와의 협정에 보인다.


곧 1920년 5월 29일 '사관 양성, 무기 구매에 대하여 상호 부조'하도록 협정을

맺었다.

사관 양성은 신흥무관학교 교관들이 북로군정서에 5월 29일 이전 파견돼 실행

되고 있었다.


무기 구매는 노령에서 무기 구매 길이 열리던 무렵이므로 노령에서 가깝고 재정

이 상대적으로 여유 있던 북로군정서가 대량 사서 서로군정서에 보낼 계획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일본군의 만주 침략으로 북로군정서가 근거지를 이동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독립군이 지닌 3800여 정의 무기, 독립전쟁 선포

1920년 들어 독립군단 무장이 급속히 강화됐다. 1919년엔 무장을 거의 갖추지

못했는데, 1920년 5월에는 2000명을 무장시킬 정도였다. 일제 문서('조특보

제27호')는, 5월 현재 독립군단의 무장은 노령에서 반입한 소총 약 2000정,

기관총 약간, 화포 2~3문으로 '무기도 점차 정비'되어가고 있었다고 전한다.


일제는 이를 경계했다.

각 독립군단에서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한 정보를 캐내 일제가 5월 15일에 정리

한 현황('조특보 제32호')도 위와 비슷했다.


곧 간도, 훈춘에서의 무장을 기관총 18정, 소총 1871정, 탄약 271,800발, 권총

255정, 폭탄 265개로 파악했다.


앞의 내용과 비교해서 화포가 없고 기관총 숫자가 명시됐지만, 소총 숫자는 큰

차이가 없다.

소총이 중요한 까닭은 편제된 독립군의 무장을 충족시키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파악한 6월의 독립군은 모두 4241명인데 소총은 전체 인원의 반 정도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7월의 집중적 반입을 통해 무장은 많이 강화되었다.


9월에 일제가 파악한 바로는 군총 약 3300정, 탄약 약 195,300발, 권총 약

730정, 수류탄 약 1550개, 기관총 9정이었다('고경 제24867호'). 소총, 권총

모두 많이 늘었다. 북로군정서 등 북만주 독립군단이 무기 구매에 주력한

결과였다.

앞서 본대로 북만주 각 독립군단의 무장 현황을 합하면 소총 3200여 정,

권총 400여 정 정도였다.


박격포 2문과 기관총 12정, 1000여 개의 수류탄도 있었다. 남만주 독립군단

의 무기를 합하면 소총과 권총 포함 3800여 정이었다.


세부명세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9월에 일제가 파악한 무기 현황과 비슷하다.

이후에도 무기를 사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일제 정보('고경 제24867호')

에 따르면 임시정부 간도파견원 안정근(安定根)이 노령에서 4000정을 계약

하고 반입을 위해 북로군정서 운반대를 파견했다거나, 북로군정서가 노령에서

30,000정의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북로군정서 운반대가 귀환한 뒤에 다시 파견되지 않았고, 또 30,000정은 구입

수 없을 정도이므로 위 기록은 사실이 아니지만, 일본군의 만주 침략을 앞둔

시점에도 무장을 확충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음은 확실하다.


57f370633dbc8032ae3f6a4d84a16cab_1596676728_19.png 


1920년 10월 일본군은 북만주 독립군을 없애려고 대부대를 파견했다.


그 무렵 일제가 파악한 독립군단 무기, 곧 청산리전투를 앞둔 시기 무기는

소총 3800정, 탄환 380,000발, 기관총 9정(실제 사용 가능한 것은 3정),

권총 800정이었다(<동아일보> 1921.4.7.). 부대 편제 수에 따라 다르겠지

3개 연대 이상, 여단 병력을 무장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20년 봄부터 9월까지 약 6개월 동안 독립군단은 항일전쟁을 전개할

대규모 무장을 갖추었다. 

이들 무기를 각 독립군단이 독자적으로 보유했다. 전투에서 무기의 통일적

전술 활용이 제한됐다.


하지만 독립군단의 통합과 그에 따른 무기 관리를 위한 노력은 활발히 이루

어지고 있었다.


북만주 독립군단들은 1920년 6월 21일 봉오동 인근에서 연합회의를 열고

통합을 논의했다.


중요 안건 가운데 하나가 '무기 구매 방법의 건'이었다. 곧 공동으로 무기

구매에 나설 것을 확인했다. 실제 공동으로 사지 않았고 독립군단이 각자

무기 구매에 나섰지만 적어도 노령에서의 무기 구매나 만주로 반입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는 공유되었다.

북만주 독립군단들이 7월에 집중적으로 무기를 구매, 반입한 것도 이러한

논의의 결과였다. 7월 1일에도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북만주 각 독립군단이

모여 통합을 위한 3개 항을 결의했는데 2항이 '독립군인의 각 단체에 속한

무기는 1개소에 집합'한다는 것이다.(주3) 이 결의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통합을 위한 노력은 독립군단의 무장을 항일부대 역량의 극대화를 위한

전제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는 여러 독립군단의 집합 전투였고 그래서 대승을

담보한 것도 무장 역량의 극대화를 기반으로 했다.

무기는 동포 적성의 결정체

3.1혁명 후 독립전쟁을 치를 무기는 동포의 의연금, 곧 군자금으로 마련되었다.


무기는 동포들이 땀 흘려 모은 적성(赤誠: 참된 정성)의 결정체였다.


군비단 강상진은 장백현에서의 군자금 모연을 이렇게 회고했다.


"다른 부업이라곤 없는 이 지방생활에서는 돈벌이 할 길이 망연하다. 기나긴

겨울밤 '고꾸리' 불빛 아래에서 뜬눈으로 손채칼에 갈아서 만든 감자앙금(전분)

을 걸머지고 첩첩산길 5-60리 장에 가서 푼푼전전으로 모아온 돈! 아니면 황소도

자리 떼임하기 힘든 류하나무통에 바를 내여 세네 사람의 합력으로 하는 산드럼,

바리텀 운반에서 하루 1절이 걸이는 벌이로 얻은 돈! 이거야말로 뼈품을 팔아서

내는 의연! 귀중한 혈전이 아니랴?"


'뼈품'을 팔아낸 군자금을 바탕으로 무기를 마련하고 전쟁을 준비하니 '귀중한 혈전'

이라는 것이다.


독립운동 자금의 많은 부분은 큰 부를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재산가에게서

나왔다. 이를테면 이회영가 6형제 둘째인 이석영은 거부였지만, 재산을 모두 처분

하여 만주로 망명해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 희생이 없었다면 신흥무관학교도 존립하기 어려웠다. 비록 가난하지만, 독립을

열망하는 동포들도 독립운동 자금을 보탰다. 액수는 적지만 그것은 동포들이 독립

간절히 바라는 표시였으며, 귀중한 자금이었다.


57f370633dbc8032ae3f6a4d84a16cab_1596676770_18.png 


따라서 무기를 비롯한 군수품은 단순한 군수품이 아니라 민족의 '피의 결정체'로

인식됐다.


국민회부대가 행군 도중 군수품(군복, 약품 등)을 중국군에게 압수당했다.


국민회는 "그 물품은 우리 군인의 정신이 들었고 또 민족의 기름과 피의 결정체"

라고 항의하며 반환을 요구했다.


일반 군수품도 그러할진대 총기는 당연히 동포의 적성이 담긴 '피의 결정체'로

인식했다. 각 독립군단이 준비한 무장은 3.1혁명 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민족

정신이 온전히 담겨있었다.

따라서 독립군은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고 탄환도 1발에 '왜적 1명'을 잡아야

하는 귀중한 것으로 생각했다(김승학, <망명객행적록>). 또 총기를 군율로 엄중히

관리하도록 했다.


북로군정서는 대한제국 시기의 '육군징벌령' '육군징벌령적요(摘要)' 등을 적용하여

총기를 소중히 다루도록 했다.

군무부는 14개 조 군율 가운데 4개 조가 총기와 관련됐다('기밀공신제59호').


6.군기(軍器)를 빼앗긴 자는 총살한다.
7.조련 중 탄약을 장전하고 있는 자는 태(笞) 30에 처한다.
9.상관의 명령 없이 총기를 분해 소재하는 자는 태 10에 처한다.
10.이유 없이 발포한 자는 태 10에 처한다.
 


6조는 실제 벌칙이라기보다 적에게 총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정신교육 뜻이다.

7조, 9조, 10조는 군총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뜻이다. 독립군단이 무장을 갖추

시작한 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오발 사건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엄격하게 관리되는 독립군 무장에는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독립전쟁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독립을 향한 동포의 적성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무장은 왜적으로부터 조국의 자유를 되찾는 정신의 표상이었다. 만주에서 널리

부르던 독립군가 『봉기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독립군시가집 배달의 맥박>).


이천만 동포야 일어나거라 /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
잃었던 내 조국과 너의 자유를 / 원수의 손에서 피로 찾아라


무장은 독립전쟁 선포의 단초였고 그 내면에 '이천만 동포'의 혈전으로 조국의

자유를 되찾는 뜻이 있었다. 독립군이 동포의 적성이 담긴 무기를 잡는 순간

동포의 독립 의지는 독립군에게 전이돼 체화된다. 전투는 독립군이 하지만

'이천만 동포'  마음이 단위 전투마다 함께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소규모 국내

진입 작전, 때로는 정규전에 맞먹는 일본군 전투를 통해 독립군 무장은 그 역할

온전히 했다. 무기는 독립을 외치는 동포의 얼이었고 탄환은 독립의 외침이

었다. 

군사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숫자의 우위'가 중요하지만, 그보다

'군인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갈파하였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기'와 '의지'만 있으면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고 했다.


3.1혁명 후 독립전쟁의 준비가 응축되어 독립군의 무장에 담겼고 이를 통해

어떤 고난이 와도 뜻을 포기하지 않는 장기 항전이 시작됐다. 


◎ 오마이뉴스 이중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