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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 무장투쟁 지도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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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28 13:11 조회10,0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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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는 10년 동안 통칭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연구

되었다.


1912년 가을에 속성 특과로 11명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속성과 본과의

졸업자가 1,2백 명 씩이었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매년 졸업자 수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신흥소중학교와 신흥

무관학교 또 이들과 연계되는 학교와 기관도 많았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전까지 신흥무관

학교를 졸업한 학생 수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를 검토해보자.

필자를 알 수 없는 『제9항 백서농장사(白西農庄史)』에 따르면, 1915년

이 농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385명이다.


이 숫자는 거의 정확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385명에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자뿐만 아니라, 신흥학교 분ㆍ지교 졸업자와 노동강습회 이수자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단단히 각오하고 독립군에서 중견 역할을 하기 위하여 병농(兵農)

학교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부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1915년 봄 이전 신흥무관학교 졸업자는 3백 명 이상일 것이라고

추정하여도 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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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3ㆍ1독립항쟁 이후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군을 뿌리 뽑는

것이 조선에서 지배체제의 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판단, 이 지역에  정예군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학살 작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중국 관헌에 압력을 가하여 한국인의 무장독립운동을 방해하고, 토족세력인

마적단조종하여 습격ㆍ납치ㆍ학살을 자행하면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하여

각급 민족운동단체들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동안 신흥소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는 만주 일대는 물론 노령에까지 수십 개의

학교와 연계하면서 지방 청년들의 군사훈련에 힘썼다.


각 지역에서 이름을 달리하는 많은 소중학교가 설립되었지만 뿌리는 대부분 신흥

학교와 신흥무관학교에서 기원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자는 3,5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데, 더 정확한 자료

앞으로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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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지역과 중국 관내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중핵이

되었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폭렬투쟁'을 선언하면서 조직된 조선의열단의

핵심멤버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강세우ㆍ권준ㆍ김옥ㆍ박태열ㆍ배중세ㆍ서상락ㆍ

신철휴ㆍ윤보한ㆍ이성우ㆍ이종암ㆍ이해명ㆍ최동윤ㆍ한봉근ㆍ한봉인 등이다.

의열단은 최초 발기인 13명에서 1924년에는 단원이 약 7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부산경찰서ㆍ밀양경찰서ㆍ총독부폭파사건, 황옥(黃玉)경부사건,

종로경찰서동양척식회사ㆍ도쿄 나쥬바시(二重僑) 폭파사건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16건의 의별투쟁을 실행하여, 독립운동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1919년

4월 한족회와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 정무청장 이탁, 군정청장 양규열, 참모장 김동삼,

교관 지청천ㆍ신팔균ㆍ김경천 등 간부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이들 외에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한족회와 서로 군정서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사는 권계환ㆍ김동식ㆍ김중한ㆍ김우권ㆍ김철ㆍ김하성ㆍ

김학규ㆍ박명진ㆍ광운ㆍ백기환ㆍ신용관ㆍ오광선ㆍ이덕수ㆍ이병철ㆍ현기선ㆍ

강화진ㆍ김춘식ㆍ박영희ㆍ백종열ㆍ오상세ㆍ이운강ㆍ최해 등이다.

또한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22년 만주 봉천성 환인현에서

조직된 통의부(統義府)에 참여하여 주요 역할을 하였다.


이천민은 군사위원을 맡아 직접 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자치행정기구에도 여러

명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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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만주 통화현에서 조직된 참의부(參議府)에는 백광운이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외에 1925년 만주 영안현에서 조직된 신민부(新民府), 1929년 만주에서

조직된 국민부 등 만주일대의 무장투쟁 단체에는 어김없이 신흥학교와 신흥

무관학교 출신들이 참여하고 중심이 되었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같은 해 10월의 청산리전투는 이청천ㆍ이범석 등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들이 '항일대첩'을 주도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40년 중국 충징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부대 광복군의 창설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지청천ㆍ김학규ㆍ김원봉ㆍ이범석ㆍ권준ㆍ신동열ㆍ오광선 등이다.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ㆍ참모창 이범석, 제1지대장 김원봉ㆍ제3지대장 김학규

등 모두 신흥무관학교 간부들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무장독립운동의 사관을 육성한 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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