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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연합뉴스] 탄생 140주년 맞은 망명 사학자·독립투사 계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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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27 13:58 조회8,3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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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2019년 4월 21일 카자흐스탄 수도 누르술탄의

국제공항에서는 독립유공자 계봉우·황운정 지사와 배우자 김야간·장해금 여사의

유해 봉환식이 열렸다.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계봉우 지사와 황운정 지사의

유골함에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족장을 헌정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유공자 유해를 국내로 모시는 것은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임무

이며 독립운동을 완성하는 일"이라면서 "이제야 조국 고향산천에 모시러 왔다"고

말했다.


이어 "네 분 어르신은 유가족과 고려인 동포에게 자긍심의 뿌리이자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고 고난을 헤쳐나갈 지혜를 주셨다"면서 "모국으로 보내드리기로 한 것이

어려운 결정이었겠으나 걱정하시지 않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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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던 독립유공자의 유해가 모국으로 봉환되는 것은 최초의

일이고, 현직 대통령이 국외에서 독립유공자 유해 봉환식을 주관한 것도 처음

이었다.


이들 4위의 유해는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2호기에 실려 고국으로 돌아왔다.


타계한 지 계 지사는 60년, 황 지사는 30년 만의 귀향이었다.


이튿날 서울공항에서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이들의 유해를 맞았다.


피 처장은 "조국 광복을 향한 험로를 걷다가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둔 지사님의

의로운 삶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고 추모의 뜻을 밝혔다.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봉송돼 유가족과 광복회원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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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봉우 지사는 1880년 8월 1일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했다. 며칠 뒤면 탄생 140주년

기념일을 맞는다.


고향에서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며 신학문을 배운 뒤 한국사와 중국사를 공부했다.


1910년에는 함경도 함흥 영생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를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한일 강제합병과 함께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11년 1월 중국 북간도로 망명했다.


북간도 소영자 광성학교에서 국사와 국어를 가르치며 교과서 편찬에 나서 간도 전역에

보급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권업신문 기자와 대한광복군정부 책임비서로 일했다.


1914년 1차대전 발발 후 일본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가 추방령을 내리자 이듬해 북간도

왕청현으로 이주했다가 1916년 11월 일본영사관 경찰대에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됐다.


인천 영종도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영흥으로 귀향해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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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철혈광복단 단장에 취임했다.


중국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 그를 북간도 대표의원으로

선출하자 11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임정에서 의정활동을 펼치는 한편 이듬해 1월부터 '뒤바보'와 '사방자'(四方子)라는

필명으로 역사에 관한 저술을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에 발표했다.


1920년 1월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에 국민회 대표로 참여했으며,

4월 이동휘가 조직한 한인사회당에 입당해 당 기관지 '자유종'(自由鐘) 주필을 맡았다.


5월에는 임정 서간도파견원으로 임명됐다. 고려공산당 창당에도 힘을 보탰고 모스크바

에서 열린 코민테른(공산주의국제연합) 대회에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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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1년 4월 고려공산당 상해파(민족주의 계열)와 이르쿠츠크파(코민테른 계열)의

갈등이 빚은 '자유시 참변'에 연루돼 혁명방해죄란 죄목으로 이르쿠츠크 감옥에 수감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해 11월 코민테른 감사위원회 결정으로 누명을 벗긴 했으나 상심이 컸다.


더욱이 계 지사와 가까운 동지이자 이동휘의 최측근인 김립이 코민테른 지원자금 횡령

혐의를 받아 1922년 2월 김구 계파에 의해 암살되자 깊은 회의에 빠져 정치에 손을 떼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6천500㎞ 죽음의 유배길을 떠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했다.


계 지사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 크질오르다에서 고려인들에게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광복 후 함께 일하자는 북한 측 제안도 거절한 채 만년을 보내다가 1959년 7월 5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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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지사는 독립운동가로서 이력도 화려했지만 저술가로 더 이름을 남겼다.


북간도에서는 월간지 '대진'의 주필, 연해주와 상해에서는 각각 '권업신문'과 '구국일보'

기자, 하바롭스크에서는 '자유종' 주필, 치타에서는 한글잡지 '새 사람' 주필 등을 역임하며

숱한 논설과 시문을 남겼다.


역사 교재 '신한독립사'와 '조선역사', '우리의 원수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제목을 지은

초등학교 교과서 '오수불망'(吾讐不忘), 한인이주사 연구에 중요 사료로 쓰이는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와 '아령실기'(俄領實記), 여성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전기 '김알렉산드라

소전', '동학당 폭동', '의병전', 희곡 '함흥민요', 한글소설 '금강산' 등이 대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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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 거주할 때는 소련 정부가 철저히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는데도 727개 항의

이두체 표기를 우리말로 옮길 때의 범례를 기록한 '이두집해'(吏讀集解)를 비롯해 '조선문법',

'조선말의 되어진 법', '북방민족어' 등 국어학 분야에 독보적인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계 지사의 공적은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고, 공산권

국가들과 국교가 열리기 전까지는 그의 만년 저술도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그해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아들

계학림 씨가 내한해 '이두집해' 등의 원고를 처음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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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지사는 엄혹한 시절 한국·중국·러시아·카자흐스탄 4개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과 한국학

연구·저술에 헌신했다.


뒤늦게라도 그의 공적과 저술이 빛을 보고 고국에 묻힌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무지와 게으름 탓에 수많은 독립투사를 외면하거나 이념의 잣대를

적용해 이들의 공적을 깎아내리고 있다. 후손으로서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이다.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