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은 혁명이다
2019년은 3.1혁명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다.
그리고 독립군 탄생 100주년이기도 했다.
2020년은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내세운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장기 항일전쟁의 시작을 알린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100주년이기도 하다.
오랜 우리 역사에서 처음이던 '전민족'의 '3.1만세함성'은 혁명이었다.
'3.1'을 통해 더 이상 왕정은 존립할 수 없게 됐으며, 실제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민주공화국이 천명됐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역, 종교, 직업에 관계없이 모두 떨쳐 일어나 독립, 자유,
평화, 평등을 외친 것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한 우리 역사의 첫 경험이었다.
200여만 명이 참가했는데 당시 인구의 10%를 넘었다.
이를 혁명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혁명인가?!
독립진영에서 3.1혁명 직후에는 '3.1절'이라 부르고 기념식을 거행했는데,
1920년대 후반부터 3.1의 함성을 '혁명'으로 형상했다.
1939년부터는 '3.1대혁명'으로 불렀고 1944년에 작성된 대한민국 임시헌장도
'3.1대혁명'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와 의정원(의회)이 수립됐음을 밝혔다.
또한 신해혁명, 러시아혁명을 이은 세계 혁명의 흐름 가운데 하나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해방 후 헌법을 기초할 때 초안에 '3.1혁명'이라 명기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헌법 심의 과정에서 '운동'으로 격하돼 현재까지 공식적으로는 '3.1운동'
으로 부르고 있다.
실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라는 풀이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견해는 북한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
북한은 3.1'봉기'가 민족부르주아 운동이라서 '실패'했다고 하며 '혁명'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
3.1혁명은 독립과 민주공화국의 수립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내세웠는데, '국내,
1919년 3~5월'이라는 제한된 시공간의 시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3.1혁명의
도도한 흐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곧 만주, 노령, 중국이라는 넓은 지역과 1919년 이후 해방까지 이어졌던 임시정부
와 무장대오의 대일항전은 3.1혁명으로 촉발된 것이고, 3.1혁명의 연장이자 계승
이었다.
3.1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해방까지 이어져 결국 성공한, 세계사에서도 드문
장기혁명이었다. 독립진영에서는 3.1절 기념행사를 통해 그 과업의 수행을 다짐하곤
했다.
3.1혁명은 '임시정부'와 항일무장대오인 '독립군'(과 그를 이은 광복군)을 통해 그
과업 수행이 이어졌다.
독립은 혁명의 일환이고 대일항전은 독립전쟁이면서 혁명전쟁이었다.
독립진영에서는 독립전쟁이 3.1혁명의 연장선에 있다고 누구나 공감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1921년 3월 1일)은 청산리전투의 승전을 알리면서
'삼일절의 산물(産物)인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라 했다.
청산리전투의 승전이 3.1혁명의 결과이며, 독립군의 항전이 3.1혁명의 연속이라는
뜻이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독립군의 희생
3.1혁명의 만세함성 현장에서 일제의 총칼에 많은 동포가 학살당했다.
청년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노령으로 망명해서 무기를 쥐고 대일항전의 최전선에
나섰다.
그리고 희생되었다. 만주·노령·중국, 그리고 국내 국경지대 곳곳은 독립군의 선혈로
물들었다.
독립군의 빛나는 승전 이면에는 독립군 전사(戰士)의 희생이 뚜렷이 존재한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독립을 염원하며 순국한 곳에는 봉분도,
묘비도 없다. 독립군이 탄생한 지 100년도 지난 지금 이름도 정확한 장소도 알 수 없다.
몇 예는 이렇다.
봉오동전투. 1920년 홍범도부대를 주력으로 한 여러 독립군의 연합부대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고 퇴각한다.
'동산' 쪽에 있던 신민단 군인 8명은 퇴각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다 전원 전사했다.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청산리전투 가운데 가장 격렬했던 어랑촌전투. 1920년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준
북로군정서의 주력은 퇴각한다.
그리고 좁은 길을 가로막아 일본군의 공격과 추격을 막으며 주력 부대의 퇴각을 돕던
1개 소대 40여 명은 모두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동녕현전투. 1933년 한국독립군은 항일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이 주둔하는 동녕현성
을 공격한다.
격렬한 전투 끝에 수십 명의 독립군이 전사했다(주3). 군의감(軍醫監) 강진해 외에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루하전투. 1934년 조선혁명군은 하루하(下淚河)에서 일만군(日滿軍)의 대규모
포위망을 뚫기 위해 격전을 벌인다.
사흘 동안의 전투에서 '고참 용사'들이 탈출구를 개척하려고 육박전을 벌여 대부분
전사한다.
이들을 포함해 많은 독립군이 전사했는데 정봉길 중대장 외에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통의부의 국내 진입 작전. 1924년 4월부터 7월까지 통의부는 29건의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했는데 9명이 전사했다.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몇 예를 들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립군의 항일전투 이면에는,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립군 전사의 희생이 있었다.
이제는 기억할 때
역사는 망각과 기억의 싸움이다. 독립군 탄생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독립군 역사를
쓰려는 것은 기억하기 위해서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희생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만주·노령의 독립군 단체 사진은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을 정도밖에 안 된다.
기록을 남기지 않고, 꼭 필요해서 기록하지만 위험할 경우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그
기록은 없애야만 했다.
신계관(광복군총영)은 1921년 국내에 진입해 작전하던 중 중상을 입고 후퇴했는데,
몸을 더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갖고 있던 서류를 불태우고 총을 부순 뒤에 독립만세를
외치며 절명했다.
군사 기밀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죽음을 앞둔 독립군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러한 대원칙이 있어서 독립군이 남긴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해방 뒤의 회고록
으로 기억의 부분을 복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독립군의 흔적은 일제기록(정보문서, 재판기록 등)과 당시 언론에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게 됐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독립군은 '무명'으로 기억해야 한다. 만주·노령·중국·국경지대
어딘가 묘비도 없이 잠들어 있을 그들을 환국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기억'이다.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국가가 최대한 자료를 발굴하여 무명이 아니었음을 확인하여
이름을 밝혀 서훈하는 것이다.
서훈은 물질 보상의 뜻보다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군을 국가가 기억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지금도 활발하게 국가의 기억을 통한 서훈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전에 다른 이의
공적을 가로채서 포상 받은 예가 있었음이 최근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니 독립된 국가에서의 서훈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오직 독립의 대의를 생각하며,
있는 기록도 지우면서 희생한 무명독립군의 발굴은 상대적으로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를테면 참의부 소속 이일권 부대 6인의 활동을 보자. 그들은 1927년 국내 작전 중 대규모
수색대(최대 1200여 명)의 포위망 속에서 3명이 전사하고 3명은 골짜기에서 굶주린 상태로
체포돼 결국 희생된다.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검색하면 2명의 포상이 확인되는데 4명은 이름이 없다.
4명도 서훈됐지만, 아직 전자사료관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하튼 자료를
확인하고 지금은 무명인 독립군의 이름을 복원하는 것은 국가가 무명독립군을 잊지 않고
있음을 우선적으로 상징한다.
하지만 앞서 청산리전투 등의 예에서 보았듯이 이름도, 순국 장소도 확인할 수 없는
무명독립군이 많다.
게다가 일제 경찰은 체포한 독립군을 국내로 송환해 재판하면 절차도 복잡하니까, 국경
근처 인적 드문 강기슭에서 아무도 모르게 학살하기도 했다.
그들은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아 생애의 흔적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결코
유명이 될 수 없는 무명독립군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국가가 그들을 위한 추모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기억의 두 번째 방법이다.
러시아는 모스크바에 '무명용사의 묘'를 만들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명용사를 기린다.
모스크바뿐 아니라 러시아 각지에 '무명용사의 묘'가 있어서 시민들이 결혼하면 바로
그곳으로 가서 참배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무명독립군을 추모하는 공간은, 국립현충원 위쪽에 있는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이 유일하다.
그곳도 뜻 깊지만, 추모의 공간을 '광장'에 만들어 누구나 쉽게 가서 참배·추모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국가가 할 수 있는 무명독립군 기억의 유력한 방법이다.
추모 공간의 건립과 더불어 '무명독립군'을 집단으로 서훈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겠다.
셋째 방법은, 독립군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망명
하고, 어떤 훈련을 받고, 어떻게 행군했는지를 보면 그들의 굳센 의지와 각오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살펴보면 풍찬노숙의 간고한 생활 속에서도 뜻을 꺾지 않고 활동한
결연한 모습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무명독립군의 삶의 흔적도 깃들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무장을 갖추고, 어떤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으며, 전투에서 어떻게 왜적을 패배시켰
는지 보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이겼던 무명독립군의 전투 모습도 드러날 것이다.
어떻게 전사하고 어떻게 체포되어 옥중투쟁을 전개했는지를 살피면, 바로 그곳에 무명독립군
의 모습도 함께 깃들어 있을 것이다.
'새로 쓰는 독립군사' 연재는 독립군 탄생 100주년과 대일항전 원년 선포 100주년을 맞아
누군가 무명독립군을 기억하고 있다는 표시다.
이 기록이 독립군의 영전에 바치는 작은 향불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