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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프레시안] 구국의 영웅 백산 안희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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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5-29 10:06 조회6,9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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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한민국 정치 형세가 보수와 진보 이념 대립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더욱이 이념 간의 갈등이 국민들 간의 골을 깊게 파 놓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물질적인 풍요에서 오는 나태함 때문일까, 아니면 정치인들의 정권 야욕 때문일까. 우리 민족은 한때 외세 침략에 굴복해 나라를 잃은 불쌍한 민족이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멸시하고 경멸하는 비 이성적인 행동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아직도 소련, 중국, 일본 강대국 사이에서 남북이 갈라져 서로가 총을 겨누는 서글픈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여기 젊은 청춘을 조국을 위해 바친 안희제 선생을 만나보자. 이분들 앞에 우리 세대는 무엇으로 답할지 깊게 반성해야 한다. 특히 정치권은... 


188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구국의 선봉자 백산 안희제 선생은 1914년 무렵, 전 재산 밭 2천 마지기 약 40만 평을 팔아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달할 백산상회(부산 동광동)를 설립했다. 


침략이라는 일본의 짓거리에 대항해 독립운동의 첫 역사를 창조하는 위대한 행보의 시작이었다.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취급했던 운영자금의 60%가 백산 선생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백산상회는 해산물과 곡물을 주로 취급했는데 충분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경주 최 부자 집의 12대 장손 최 준 선생과 이우식 선생 등 영남의 지주들이 그 때 당시 100만 원(현 300억 상당)을 지원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16년 설립된 백산무역상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금은 독립자금으로 전액 사용되었다. 물론 일본을 속이기 위해 모든 지원 내용은 장부 거래형식이었다.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된 장부내역은 훗날 백산선생의 청렴과 애국심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백산무역에서 지원하는 독립자금의 수송수단은 독립군의 이동식 별식인 망개떡(의령 특산물) 도시락이었다. 짚으로 만든 도시락의 맨 밑바닥에는 자금을 깔고 그 위에 솔잎을 얹혀 망개떡을 깔았다.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을 눈여겨보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어맞아 백산 선생이 독립자금 전달에 실패한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훗날 독립 후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된 조선의 땅을 밟던 첫날, 제일 먼저 한 일은 측근에게 백산선생이 묻힌 곳이 어디냐고 묻고 그 곳을 향해 큰 절을 올린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 백산선생의 애국심을 잘 알고 있는 선생을 향한 존경심과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또한 그 누군가의 이간질로 백산선생을 의심했던 최부자에게 백산선생을 거쳐 백범에게 전달된 독립자금이 단 1원도 틀리지 않았다며 백범이 독립자금장부를 보여주자 오해가 풀린 최부자는 오열과 함께 백산선생을 부르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백산선생은 모금된 독립자금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심지어 전달과정의 여비까지도 계산하지 않았고 개인의 자금을 사용했다. 모든 것이 오해였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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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선생의 업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1927년 일제에 발각된 백산상회가 폐업되자 1930년 망명해 발해농장설립과 만주에서 교육사업을 펼쳤다. 


백산선생은 기미육성회를 조직하여 조선인재에게 해외유학의 길을 열어 주는 등 교육이 조선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이를 실천하는 분이었다. 또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설파하여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기도 했다. 


3.1운동의 시초가 된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여비 전부를 백산선생의 개인 돈으로 지원했다. 


비록 파리회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프랑스 정부요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의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로 시작된 3.1운동이 백산 선생의 지원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백산선생은 1907년 부산 동래와 의령에 각각 구명학교와 의신학교를 설립했다. 또 1909년 서상일·박중화·신성모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25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인수, 중앙일보사(中央日報社)로 개칭하여 사장이 된 후 총독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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