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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미디어오늘] "우리는 늙고 죽지만, 동아의 친일 역사는 지울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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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4-02 09:45 조회5,1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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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2014년 2월 인촌기념회 신임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인촌기념회는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의 유덕을 기리는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이다. 사법농단 혐의로 재판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으로 활동했고 이 대법원장이 2011년 퇴임한 뒤 대법원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인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지난 27일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인촌기념회 이사장을 맡은 뒤 ‘양승태 대법원’은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박정희 유신에 맞서다 1975년 해직된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PD·아나운서들이 결성한 단체) 재판에서 박정희 유신과 동아일보에 면죄부를 줬다. 우리 재판도 사법농단 사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와 양승태 사법부의 유착을 의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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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1일은 동아일보 100주년이다. 동아투위는 2020년 결성 45주년을 맞았다. 동아투위 위원인 이부영 이사장은 “지난 45년 동아투위와 동아일보는 평행선을 달려왔다”고 술회한 뒤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1919년 3·1운동 후 일제의 ‘문화 통치’로 탄생했던 신문사였다. 태생적으로 친일 색깔을 띠지 않을 수 없는 매체였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대법원이 지난 2015년 5월 “정권 요구에 굴복해 기자들을 해직했다는 인과관계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며 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을 취소시킨 판결 등이 역사를 역행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MB 정부 때인 2008년 10월 과거사위는 2년 반 동안 조사를 통해 “동아일보는 비록 광고 탄압이라는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야기된 경영상의 압박이 있었다 하더라도 동아일보사의 명예와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 왔던 자사의 언론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요구대로 해임함으로써 유신 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사위는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을 인정하고 국가가 사과와 피해 회복에 나서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동아일보에도 “유신정권의 요구에 굴복해 언론자유수호 활동을 한 기자들을 해고한 것을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은 동아일보 책임을 인정한 과거사위 결정을 취소했다. 유신 시절 중앙정보부에 굴복한 동아일보 경영진이 저항 언론인 113명을 강제 해직했다는 사실이 ‘양승태 대법원’을 거치며 ‘경영상 판단에 따른 결정’으로 책임 소재가 희미해졌다.

이 이사장은 “박근혜 정권 때 양승태 대법원은 아버지 박정희 독재의 언론 탄압을 세탁시켜줬고 동아일보의 경영 악화로 해직된 것처럼 면죄부를 줬다”며 “현재 양승태 사법농단 재판이 진행 중인데 검찰이 다시 수사해야 한다. 권력과 언론과 대법원이 야합해 동아투위 사건을 털어낸 것이다. 우리가 다 죽고 나면 역사적 사실이 잊힐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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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 이사장은 1975년 2월 김지하 시인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동아일보와 박정희 정권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였다.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 시인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구치소를 나와 있었다.

김 시인은 구치소에서 인혁당 사건으로 붙잡힌 이들이 자신에게 해준 증언을 1975년 2월25~27일 3회에 걸쳐 동아일보 1면에 ‘고행-1974’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유신 정권이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라는 폭로였다. 이 이사장은 “옆에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그가 쓴 글이었다. 정권이 민청학련 상부에 인혁당을 그려놓고 민청학련이 북한공산도당 지령을 받는다고 조작한 것인데, 김지하씨가 고문 조작을 동아일보 지면에 폭로했다. 김지하는 동아일보 연재로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바로 체포됐다. 고문 조작 사실이 폭로되며 박정희 정권은 무너지다시피 했다. 그 다음 동아일보 기자들이 쫓겨났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1968년 동아일보 기자 입사 때는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전야였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이 그때도 극심했다”며 “사회부 경찰 기자 보조 역할로 돌아다녔는데, 청계천이나 봉천동 꼭대기를 열심히 취재해, ‘연탄 값 폭등’, ‘연탄 품귀’ 같은 기사를 쓰면 정보부에서 잡아갔다. 왜 사람들을 선동하느냐는 거다. 정보부는 갓 들어온 기자들을 그런 식으로 길들였다. 그래야 그 기자가 고참이 되어도 말을 잘 들을 테니까”라고 했다. 이 이사장은 “그 시절은 화가 나서 술만 퍼먹고 그럴 때였고 소위 ‘엘리트’ 기자들은 공화당이나 유신정우회, 정부 대변인 등으로 떠났다. 신문사에 남아 있다는 건 결국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는 것인데 동아일보에 모였던 기자들이 그랬다. 오늘날까지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동력”이라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박정희 유신 시절 중앙정보부가 광고주들을 압박해 빚어진 ‘백지 광고’ 사태와 이를 채운 시민들의 ‘격려 광고’를 영광의 역사로 평가한다. 해직 기자들에 대한 사과와 복직을 외면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 이 이사장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때, 일장기를 지운 건 동아일보 기자 3명이었다. 사주 김성수는 ‘몰지각한 행동’이라고 개탄했고 사장 송진우도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웠다’고 분개했다. 사장부터 평기자까지 13명을 해고했는데 기자 3명과 사회부장(소설가 현진건)은 해방 이후 복직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동아투위와 비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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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75년 3월 우리를 내쫓고 1980년의 봄, 1987년 민주화 등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동아일보는 복직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며 “나는 그것이 동아일보의 친일 DNA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 신문은 박정희 쿠데타와 유신, 전두환의 독재를 모두 지지했다. 이에 맞섰던 언론인들을 내쫓고는 다시 들이지 않는다. 역사를 세탁하고 뒤집으려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이사장은 “얼굴에 분을 바른다고 본 바탕이 없어질까. 역사는 조작할 수 없는 것”이라며 “동아일보에 입사해 막 수습 딱지를 떼어낼 때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 역사를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동아일보의 과거 지면을 보면서 그때 알게 됐다. 얼마나 지독한 친일이었고, 얼마나 친일파를 옹호했는지 말이다. 역사는 그런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동아투위 영향력이 과거보다 줄고 우리도 늙고 죽는다”며 “우리가 죽는다고 동아일보 친일의 역사가 감춰질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꿈 깨시라”고 강조했다.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