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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혁명일기'에 어떤 사연 담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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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7 18:22 조회9,2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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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49회] 1964년 1월 초하룻날부터 1년 동안 거의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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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어떤 계기였는지, 김성숙은 1964년 1월 초하룻날부터 1년 동안 거의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

독립운동가 특히 의열단 계열에서는 여간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자칫 일제나 밀정들의 손에 들어가 동지들의 연루를 막기 위해서였다.

어느덧 그의 나이 66살, 중로(中老)의 길이고 정치ㆍ사회적인 발판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환국 후 독거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주위에서 짝을 맺어주어서 가족이 생겼다. 


부인 김명선은 1921년 생이고, 청운(아들)ㆍ천연(딸)ㆍ사명(아들) 3남매를 두었다. 중국에 남은 아내 두군혜와 아들 셋은 만날 길이 없고, 냉전시대의 한ㆍ중 관계가 호전될 가망은 까마득했다.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까치들이 다리를 놓아주어 1년에 한 차례씩 만난다고 하지만 지상의 김성숙은 이름자에 별(星)을 달고서도 만날 길이 없었다. 체념과 고독이 새 가정을 꾸리게 된 동기였을 것이다. 


그의 생애에 어느 때라고 생활이 안정된 시기가 없었으나 이 무렵은 특히 어려웠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혁신계는 초토화되고 정치활동은 커녕 생계의 길이 막혀 상거지 노릇으로 연명해야 했다.

김성숙이 '혁명일기'라는 제목으로 1년 동안 쓴 일기에는 "집에 쌀이 떨어지고 돈 한 푼 없어서 탁발하러 외출"이라는 기록이 수없이 나온다. 젊은 시절 한때 승려 생활을 했기에 지인들로부터의 도움을 '탁발'로 표현했다.

이 무렵 그는 심한 천식을 앓았다.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동지들을 만나고, 민주사회당을 창당하고자 당사에 나가고, 4월부터는 『나의 혁명생활』이라는 원고를 쓰기 시작했으나 건강 악화로 많이 진척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의 일기에 "만약에 식생활문제만 해결하게 되면 안심하고 독서와 저작에 노력해보고 싶다"(1964년 3월 17일)고 썼다. 파란만장의 생애를 본인이 직접 썼다면 독립운동사의 소중한 문헌이 되었을 터인데 아쉽기 그지없다.

김성숙의 '일기'는 매일 200자 원고지 2~3매 분량의 국한문으로 섞어 씌였다. 혼용체는 그의 세대가 살았던 시대상이기도 하다. 짧은 일기에는 생활ㆍ가족ㆍ교우ㆍ국내외 정세 등이 진솔하게 담겼다. 내용 중에는 신병과 '탁발' 그리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짓고 있는 집의 문제가 있고, 중국에 남아 있는 아내와 자식들의 꿈 얘기도 담겼다.

옛날 독립운동 동지들 그리고 해방 후 혁신계 활동을 함께한 동지들과 만나서 차를 마시고 반찬값을 얻고 약주를 나누는 정경은 지극히 소시민적이다. 다만 생애의 절반 이상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바친 혁명가의 노후가 이토록 비참했는가를 되돌아 볼 때 우리 현대사의 모순구조를 거듭 살피게 한다.

특히 민정으로 이양하고도 계속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1963년경부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훈을 실시하면서 김성숙ㆍ장건상ㆍ정화암 등 혁신계 독립운동가들을 제외시킨 대목에 이르러서는 때늦은 분노에 한동안 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일본 육사출신의 일본정신 '야마도 다마시(大和魂)'이 여전히 작동하는 한국정치의 비극적인 현상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여전히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뒷조사를 받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임의로 '일기' 몇 편을 골라 소개한다. (한글체 부분을 중심으로) 첫날의 일기다.

1964년 1월 1일 수요일. 춥고 맑음.

1963년은 가고 1964년이 왔다. 새해는 지난해의 계속이지만 그래도 고난에 싸여 있는 나로서는 또 무슨 행운이나 닥쳐오지 않을까 하는 새 희망을 가져 본다.

작년 일년 중에는 내가 염원했던 일이 모두 성취되지 못했다. '민주사회주의 동지회'를 조직해서 민주당으로 발족해보려 그 애를 무척 써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친우들이 나를 위해서 집을 지여준다고 시작된 소위 피우정(避雨亭) 건축도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염원은 새해에는 기필로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나라 일을 하기 위해서  나 개인이 살기 위해서 민사당(民社黨)과 피우정은 꼭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주석 1)

주석
1> <운암 김성숙 혁명일기>, 운암 김성숙선생 기념사업회 김성숙연구소, 채륜, 2011, (<혁명일기>로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