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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경기일보]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3. 조국 광복을 위해 폭탄이 되다… 의열단원 남정각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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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2 10:39 조회6,8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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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심장 ‘조선총독부’ 폭파 물거품 통탄

1948년에 반민특위가 출범하여 악질 친일파를 체포했다. 이때 체포된 친일파 중에 이인희라는 자가 있다. 그는 군자금 요청하는 의열단을 경찰에 밀고한 갑부였다. 이인희의 고발로 체포되어 7년을 감옥에서 보낸 남정각이 반민특위 증언대에 섰다. 

“이인희는 이완용에 못지않은 반민자라 사료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거사가 실현되었더라면 민족 만년에 그 쾌거가 남았을 것이며, 우리 민족 전체의 자랑이 되었을 것을 본인이 체포됨으로써 미리 약속했던 폭탄 영수자가 없어서 사건 전체가 수포로 돌아가고 김시현, 황옥 등 동지가 체포되었습니다. 당연히 극형에 처할 악질자입니다.” 

약산 김원봉과 의기투합하다 
“민족 전체의 자랑”이 되었을 거사를 준비했던 남정각(南廷珏, 1897~1967)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서 태어났다. 호를 오산(午山)이라 하고, 남영득(南寧得, 英得)으로도 불렸던 그는 영의정을 지냈으며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로 유명한 숙종대의 문인 남구만의 직계 후손이다. 1913년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는 16세에 상경하여 서울기독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면서 기독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이상재, 이필주 같은 애국지사들을 통해 독립운동에 뜻을 품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고향 용인과 안성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경찰의 체포를 피해 그해 8월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남정각은 북경 중국청년회 어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그해 12월 학교를 중퇴했다. 천진·상해 등지를 돌며 망명한 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던 남정각은 장춘에서 김원봉(1898~1958)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면서 동지가 되었다. 1921년 겨울 북경에서 김원봉을 다시 만났다. 이때 김원봉은 윤세주, 황상규 등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는 물론 조선총독부를 폭파한 것도 의열단이었다. 김원봉이 의열단의 취지와 투쟁방식을 들려주고 가입을 권유하자 그는 흔쾌히 단원으로 가입했다. 

한편 1921년 말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을 때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은 총력을 기울여 외교운동을 전개했다. 기대와 달리 일제의 방해공작과 열강들의 무관심으로 조선의 독립문제는 의제로 상정되지도 못했다. 외교활동이나 자치운동은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열단은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진 독립운동 진영의 투쟁의지를 북돋우기 위한 투쟁을 계획했다. 1922년 하반기에 군자금 조달과 연계하는 국내 폭탄 거사와 대규모 암살 파괴 거사를 동시에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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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남정각 의사(앞줄 왼쪽에서 1번째)와 의열단원들이 모임을 갖고 찍은 단체사진.

독립운동 진영의 투쟁의지를 북돋우기 위한 투쟁 
1922년 6월 천진에서 남정각은 국내로 들어가 김한(1887~1930)의 거사 의지를 타진해 달라는 김원봉의 지시를 받았다. 임시정부 사법부장을 지낸 김한은 국내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지도자로 남정각도 장춘에서 김원봉과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6월말 국내에 잠입한 남정각과 류자명은 서울에서 김한을 만나 의열단의 계획을 알렸다. 이에 김한은 폭탄을 중국 안동까지만 운반해 주면 자신이 부하들을 시켜 국내로 반입하여 조선총독부 등에 투척하겠다고 다짐했다. 김한의 의지를 확인한 두 사람은 곧 출국하여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김한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김원봉은 남정각에게 거사 자금 2천원을 김한에게 전달할 것을 부탁했다. 8월에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김한에게 자금을 전달하고, 폭탄 반입과 투탄 계획을 확정하고 출국했다. 그 해 10월 20일 김원봉이 남정각을 찾아와 폭탄을 전달할 준비를 끝냈다고 전하면서 국내로 들어가 직접 폭탄을 투척할 뜻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남정각은 흔쾌히 동의하고 김원봉에게 폭탄 투척방법을 배워 연습까지 마쳤다. 12월 28일 동지 이현준과 같이 입국하여 서울에 머물면서 폭탄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의열단 동지 김상옥이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뒤 10여 일 동안 수백 명의 무장경찰을 상대로 신출귀몰하게 총격전을 전개하면서 일경 여러 명을 사살하고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감시와 경계가 한층 강화되어 폭탄 운반이 더욱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김한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남정각은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서울을 빠져 나가 북경을 거쳐 2월 1일 천진에 도착했다. 김원봉을 만나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한이 체포되었지만 김시현(1883~1966)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대규모 암살·파괴 작전이 계속 추진 중이라는 사실과 운동자금이 부족하여 동지들이 몹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폭탄 도착을 기다리면서 동지들과 거사 자금을 자체로 조달하는 계획을 세웠다. 동지 유시태(1890~1965)와 협의하여 부호 이인희로부터 거사 자금을 거출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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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사건 신문조서


2월 21일 그는 상해에서 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정 모라 가칭하고 유시태와 함께 이인희의 집에 가서 군자금 5천원을 요구했다. 적극 협조하겠다던 이인희는 당장 거금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며칠간 기다려 줄 것을 간청했다. 약속한 3월 3일 남정각이 홀로 이인희의 집을 찾아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10여 명의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종로경찰서로 끌려간 남정각은 혹독한 구타로 정신을 잃기까지 하면서 강도행위라고 주장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유시태도 이인희 집을 찾았다가 체포되었다. 매일신보 3월 8일자에 ‘권총 강도 공범자 남정각과 그 누이동생까지 공범자로 잡아 엄밀히 취조’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편 경기도 경찰 황옥의 수상한 움직임을 주시하던 함경도 경찰에게 3월 15일 신의주에서 김시현·유석현 등 단원들이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일경에게 압수된 거사 물품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건물 파괴용 폭탄 6개, 방화용 폭탄 17개, 암살용 폭탄 13개 등 폭탄 36개, 권총 5정과 실탄 155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혁명선언> 361부,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협박문 548매 등이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며 의열단의 강령을 기사형식으로 일부 소개했다. 

“그런데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에는 4개 조건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1. 민중은 우리들의 혁명운동의 대본영이다. 2. 폭력은 우리들의 혁명에 유일한 무기이다. 3. 우리들은 민중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천만년이 지날지라도 이 강도 일본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하여 폭력에 의한 암살·파괴·폭동 등을 끊이지 아니할 일. 4. 우리들의 생활에 적합하지 못한 제도를 벗어나서 인류가 인류를 압박하고 권력이 인류를 압박하는 등의 일이 없는 이상적 조선을 세울 일 등이다.”

훗날 이 사건에 경기도 경찰 간부 황옥, 여류 화가 나혜석 부부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의열단원 12명의 공판이 벌어졌다. 그는 최후진술을 했다. 

“나는 한일 합병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오직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받쳤소이다. …나는 조선 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은즉 나의 형벌에 대해서는 사형도 좋소이다.” 

재판정에서 남정각의 법정 최후진술을 목격한 동아일보 기자는 ‘말끝마다 피가 돋는 남영득의 진술’이란 제목으로 의기에 찬 그의 모습을 전했다.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출옥하자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한 남정각은 비밀리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천진교민회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사업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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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이 무기를 반입한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의 호외, 동아일보 기사 ‘말끝마다 피가 돋는 남영득의 진술’, 의열단기밀부가 친일 부호들에게 군자금 요구를 위해 제시한 협박용 문서

건강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약자 편에 서다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했다. 남정각은 교민회를 가동하여 동포들의 귀국을 돕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천진에서 동분서주하며 동포들의 귀국 배편을 마련하고, 또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동포들의 귀국 여비로 제공하는 등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한 후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1946년 남정각은 5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유시태를 중심으로 고려동지회를 조직했다. 고려동지회는 실천 강령을 이렇게 제시했다. ‘전민족의 총의에 기반하여 수립된 정부를 지원하고, 실천적 활동으로 건국 대업에 기여하며, 가장 진보적인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산업의 진흥을 도모하고, 특히 농민대중을 지도하여 그들의 질적 향상과 농업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며, 건실한 사회의 기초가 될 건전한 인격의 수련을 도모함이다.’ 남정각은 동지들을 농촌으로 파견하여 농민들의 의식개혁과 생활향상을 도모하는 계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전쟁 피해를 입은 동포들의 구호사업을 벌이는 등 귀환 동포들의 생활안정에도 힘썼다. 

1963년 정부는 남정각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67년에 별세하자 국립서울현충원애국지사 묘역에 모셨다. 고향 용인시 모현읍 파담에는 용인향토사학회와 후손들이 세운 의사의 유허비가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