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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한겨레] "임시정부 좌우 거목들 가운데 김원봉만 빠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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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20 09:17 조회5,7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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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장 신용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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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책 내용의 90%는 만족합니다. 다만 임시정부 군무총장 김원봉(1898~1958) 선생을 넣지 못한 점은 아쉬워요.” 

신용하(82)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의 말이다. 그는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이 최근 펴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특별판>(전 3권) 편찬 책임을 맡았다. 독립기념관은 4년 전에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을 내기로 하고 편찬위를 구성했다. 서훈자 1만3천여명(2015년 기준)의 독립운동 행적을 작은 전기로 기술해 사전에 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작업을 하기에 4년은 너무 짧았다. 기념관은 완간 시기를 2024년으로 늦추고 올해는 독립운동가 124명과 외국 후원자 20명을 수록한 특별판을 냈다. 김구,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등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 서훈자 모두와 독립장 가운데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길선주 목사 등이 실렸다. 13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사무실에서 신 위원장을 만났다.

작년 말 기준 독립유공자는 1만5180명이다. 3년 새 2천여명이 늘었다. 신 위원장은 30~40권 분량의 완성본 사전엔 1만6천여명이 실릴 것으로 봤다. “올 1월 이후 서훈자는 가나다순에선 빼고 보유 편으로 묶을 겁니다.”

그는 “임시정부 거목 중엔 약산 김원봉 선생만 빠졌다. 정부와 정치권이 합의해 최종본엔 포함시키면 좋겠다”고 했다. 약산은 해방 뒤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약산은 의열단 단장뿐 아니라 조선의용대 사령관, 충칭 임정 군무총장, 광복군 부사령관 및 제1 지대장을 맡은 걸출한 독립운동가이죠. 김구 선생 다음으로 독립운동에 공이 큽니다. 이런 분이 북쪽에선 임시정부·연안파로 몰려 숙청되고 남쪽에선 월북·북한 정권 파라며 서훈 대상에서 보류되었죠. 이런 상황에 이르게 한 분단 현실이 개탄스러워요.”

편찬위원장 선출 경위를 물었다. “130여 명이 참여한 편찬위원회 창립총회에서 거수투표로 뽑혔어요. 사전 편찬 일은 번잡하지만 다른 어떤 일보다 보람 있고 영예로운 일이죠.”

특별판이 민족주의자 중심이어서 독립운동의 전체상을 보여주기에는 다소 미흡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약산을 빼곤 3·1 운동과 임정에 관여한 좌파는 다 포함했죠. 좌와 우를 넘어 전 민족적 입장에서 객관적인 사전을 편찬하려고 했어요. 좌파도 이동휘, 여운형, 김성숙, 유림, 장건상, 박열 선생이 들어갔어요.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때도 그렇고 1944~45년 충칭 임시정부 때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연합정부였어요. 임정은 우파 민족주의자만의 조직이 아니었죠. 정부도 서훈 규정을 바꿔 1948년 정부수립 이전에 돌아가신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을 한 등급 내려 서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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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이 최근 3권으로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특별판>

여러 세력이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래도 주도 그룹은 민족주의자였다는 말도 했다. “제1부대가 민족주의자, 제2부대가 사회주의 계통이었죠. 무정부주의자들이 제3부대였고요. 박헌영 같은 공산주의 운동가는 일제강점기 때 고초를 많이 겪었지만 목표가 무산자 해방이라 독립운동 측면에선 간접 효과만 있었다고 봐요.”

그는 특별판에 김구 주시경 박은식 홍범도 김좌진 이갑성 편을 직접 썼다. “더 많은 집필 요청이 있었는데 나머지는 거절했죠. 저 같은 1세대 독립운동 연구자들은 독립운동 연구를 학문의 한 분야로 정착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그래서 중요한 인물부터 연구했죠. 저서와 박사 및 연구논문 기준으로 집필자를 선정하다 보니 많은 요청이 들어온 것 같아요.”

해당 인물에 정통한 전문 연구자들이 쓴 1차 원고를 다른 연구자들이 따로 검토했단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술을 위해서죠. 혹 빠진 게 있거나 기울어진 게 없는지 살폈어요. 필자들한테 알기 쉽게 쓰라고 특히 강조했어요. 가독성을 위해 사진과 그림도 많이 넣는 것을 원칙으로 했죠. 독립운동은 비밀운동이라 앞으로도 새 사실이 나올 수 있어요. 새 자료가 나오면 계속 고쳐야 합니다.”

그는 2003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에서 정년 퇴임했다. 서울대 강단에 선 1960년대부터 그의 일관된 학문 주제는 한국 근대사회와 민족 문제다. 민족을 주제로 한국 근대사회를 파고든 것이다. 박사 논문이자 월봉저작상을 받은 첫 저술 <독립협회 연구>(1976)가 그 출발이었다. 조동걸, 윤병석 교수 등과 함께 제1세대 독립운동연구자로도 불리는 이유다. 독립기념관 부설 독립운동사연구소 초대소장(1987년)도 지냈다. “제 학문의 중심 주제가 민족인 까닭에 근대는 민족운동사, 일제강점기는 독립운동사 중심으로 연구했어요.” 60살 이후에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저한테 정년은 없어요. 정년 뒤에도 매년 책 한 권씩은 냈어요. 제 책 60여권 중 16권 정도는 정년 뒤에 나왔어요. 앞으로 10년은 더 연구할 수 있어요.”

독립운동 서훈자 행적 기록한 ‘사전’ 
독립기념관 위촉받아 4년간 작업 
내용 방대해 올해 1차 ‘특별판’ 펴내 
1만6천여명 담아 2024년 완간 ‘목표’
 

“한국전쟁 아픔이 학문 열정의 뿌리” 
“전쟁 유도에 절대 말려들지 않아야”
 

지난해엔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지식산업사)를 냈다. 2010년 내기 시작한 고조선 연구 3부작의 마지막 저서다. 지금은 ‘인류 초기 문명사에서 고조선 문명의 위치’에 대해 탐구하고 있단다. 3부작을 쓰는 9년 내내 중국을 찾았고 ‘홍산문화’ 유적지인 랴오닝 성 우하량은 세 번이나 갔다고 했다. 그는 최근작에서 “고조선 문명이 중국 황하 문명보다 앞섰으며 수메르와 이집트에 이어 인류 세 번째 문명이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문명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형성돼 황하 문명에 영향을 줬고 마야 아스테카 문명의 모체가 되었죠.”

나이를 잊은 학문 열정의 뿌리가 뭘까? “한국전쟁의 아픔을 잊지 않고 있어요. 그 힘으로 지금껏 쉬지 않고 공부하고 있어요.” 말을 이었다. “13살 때 한국전쟁이 났어요. 동족상잔의 피해를 내 눈으로 보면서 왜 분단이 됐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때 와세다대를 나온 아저씨가 국가를 공부하려면 정치학과를, 민족을 알려면 사회학과를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서울대 사회학과에 들어갔죠.”

‘한국 근대사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하게 된 것도 분단의 뿌리를 알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했다. “일제 침략을 당해 분단이 됐잖아요. 식민 통치를 당한 이유는 뭡니까. 구한말에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지 못해서죠. 적어도 19세기로는 올라가야 분단의 원인을 알 수 있겠더군요.”

고대사에 대한 관심도 같은 이유에서다. “젊은 교수 시절부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고 싶어 고대사 전문가인 이기백, 김철준 교수를 쫓아다녔어요. 두 분이 저를 기특하게 생각했죠. 하지만 그분들에게도 답을 찾지 못했어요. 환갑을 맞아 제가 직접 민족형성의 기원을 찾겠다는 결심을 했죠.”

60살 넘어선 민족 뿌리 찾기에 몰두

“민족은 통일 위한 강력한 가치체계 

식민지 근대화론은 어불성설”

민족은 여전히 소중한 가치일까? 자유와 개인의 가치가 힘을 얻고 다인종사회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하자 그의 답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우리 민족이 자유 해방을 찾았으나 여전히 통일은 못 찾았어요. 통일하는 날까지 민족주의를 버려선 안 됩니다. 민족주의는 통일을 위한 가장 강력한 가치체계이죠.” 말을 이었다.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의 통일과 자유, 발전을 추구하는 가치체계이죠. 민족주의는 민족 이외의 다른 가치체계와 결합할 수 있어요. 제일 먼저 제국주의와 결합하죠.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입니다. 선진열강과 아시아의 일본이 이걸 추구했어요. 자기 민족의 이익을 위해 약하거나 뒤처진 민족을 침략, 점령하고 수탈했어요. 인류에 유해한 민족주의죠. 한 편으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대항한 민족주의가 있어요. 자기 민족의 자유를 찾기 위해 민족해방운동과 결합한 민족주의죠. 민족해방적 민족주의입니다. 과거 인류의 4분의 3이 식민 통치를 받았어요. 이들을 독립시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준 긍정적 역할을 한 민족주의입니다. 한국 민족주의는 후자이죠. 우리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라고 착각하고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분들이 있어요. 공부가 덜 돼 그런 겁니다. 우리 민족은 통일하면 최선진국이 됩니다. 그 뒤에도 약한 나라를 도와야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를 추구해선 안 됩니다.”

그는 “제2의 한국전쟁은 절대 안 된다”며 “남과 북이 1단계로 영구 평화체제를 만들고 그다음에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평창 동계 올림픽 직전에 남북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어요. 평창을 기회로 (전쟁을 초래할) 아주 위험한 핀 하나를 뽑았어요. 지금도 위험한 핀이 남아 있어요. 어떤 개입이나 조작으로 전쟁을 유도하더라고 절대 말려선 안 됩니다. 한국전쟁 때 300만명 가까이 죽었어요. 지금 전쟁이 나면 자멸입니다.”

지난 100년 민족 운명의 변화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식민 통치와 동족상잔을 겪었고 지금도 천문학적인 자원을 남북 군사 대치에 쏟는 불리한 여건에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어요. 평화통일을 이룬 뒤엔 미국이나 독일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을 능가하는 세계 정상국가가 될 수 있어요. 한국 부모의 교육열을 보세요. 우리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나라가 없어요. 자원이 없어도 이 교육열을 가지고 인류가 성취한 모든 걸 배워 정상에 설 수 있어요. 정상에 선 뒤라도 절대 남을 침략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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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연석회의에 축사를 낭독하는 김원봉. 한겨레 자료사진

그는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가 있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매우 비판적이다. 2006년엔 <일제 식민지정책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이란 책까지 냈다. 이런 그를 두고 어떤 식민지근대화론 주창자는 ‘정치화된 역사’라고 날을 세우기도 했다. 실증보다 민족을 앞세운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어불성설입니다.” 왜? “정치적 근대화란 군주제를 공화제로 변혁시키는 것입니다. 경제적 근대화는 봉건제도와 상업자본주의를 산업자본주의로 변혁시키는 것입니다. 사회적 근대화는 신분제를 없애 국민이 시민권을 가진 시민사회로 변혁시키는 것이죠. 문화적 근대화는 특권계급 중심의 중세 문화를 모든 국민 성원들이 쉽게 누릴 수 있는 서민 문화로 변혁시키는 것이죠. 그런데 일제 총독부는 3·1 운동 뒤 외국에서 민주 공화제를 채택한 임시정부를 적성기관으로 여겨 없애려고 했어요. 정치적 근대화를 죽이려고 했죠. 경제적으로는 산업자본주의는 허용하지 않았어요. 반봉건지주제를 엄호하고 상업자본주의만 허용했죠. 1910년과 1919년 사이엔 한국인이 큰 공장을 세우려고 해도 총독부가 허가해주지 않았고 1919년 이후엔 친일파만 허가해주었죠. 신분제는 갑오개혁 때 우리 민족 스스로 폐지했어요. 총독부는 언론과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물론 생명과 신체의 자유도 소멸시켰어요. 우리 민족을 권리 없는 식민지 노예로 만들었어요. 일제 말기엔 한국 문자나 이름도 못 쓰게 했죠. 이게 어떻게 근대화입니까? 어불성설이죠.”

식민지근대화론에 비판적인 학자들도 일제강점기 때 경제 성장이 있었다는 점은 대체로 수긍하는 것 같다고 하자 이렇게 받았다. “경제 성장에 동의할 수 없어요. 식민지근대화론은 조선총독부의 행정 홍보를 현대 학문으로 해석해 홍보해주는 것과 같아요.” 설명이 이어졌다. “1936년과 1945년 사이에 북한 흥남과 진남포 일대 그리고 경인 지역의 영등포 쪽에 일제의 대륙침략에 사용되는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큰 공장이 많았어요. 이른바 ‘대륙전진 병참기지’죠. 한국인 징용 노동자가 반노예 상태로 거기서 일했어요. 일본 대재벌 소유였던 흥남과 진남포 일대 공장은 철조망을 쳐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죠. 이렇게 군수 조달품을 만든 게 조선총독부 통계에 그대로 잡혔어요. 해방 뒤 소련군이 와서 흥남과 진남포 일대 군수품 공장을 다 뜯어갔어요. 뉴라이트가 말하는 경제 성장은 진실이 아닙니다. 한 발짝 더 들어가면 답이 나와요.”

문화예술 분야에선 ‘근대화’가 있었지만 그것도 일제 덕은 아니라고 했다. “3·1 운동 뒤 한국에서 신문학과 신예술 운동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총독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한국인 스스로 만들었어요. 근대화를 저지하려는 일제에 맞서 우리 민족이 죽을 수 없다며 투쟁해 근대화를 이룬 것이지 총독부 업적이 아닙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