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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주의소리] '독립'과 '해방'을 꿈꾼 한 지식인의 삶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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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11 10:58 조회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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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125)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아리랑》, 동녘,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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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아리랑》, 동녘,2005.

출처=알라딘.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 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등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아리랑》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아리랑》이 초판된 것은 1984년이었다. 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 대신 '님 웨일스(Nym Wales)'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아리랑의 작가는 남편 에드거 스노와 함께 1930년대 격동기의 중국 혁명가들을 취재하여 《붉은 중국의 내부(Inside Red China)》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부부는 국공 합작 결렬 후 중국 현지에서 취재했고, 중국혁명에 대한 중요한 저서들을 출간했다. 그들은 단순한 저널리스트가 아니었다. 부부는 극동의 혁명을 지지했으며 중국혁명의 순간순간을 같이 했다. 우리나라에서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은 1985년 초판이 나오자마자 금서로 지정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아리랑과 함께 80년대 청년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 책은 1937년 중국 옌안에서 님 웨일즈와 김산의 우연한 만남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옌안은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다. 중국 공산당 홍군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370일 동안 9600km를 걸어서 옌안으로 탈출한 대장정(大長征)을 끝내고 옌안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1937년 초여름, 웨일스는 남편과 함께 옌안으로 들어가 22명의 혁명가와 인터뷰했다. 옌안 루쉰도서관의 대출자 명단에 수북이 적힌 김산의 이름은 님 웨일즈로 하여금 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대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의 삶을 기록한 저서 ‘아리랑(Song of Ariran)’의 집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교분이 깊었던 에드거가 마오쩌둥을 취재하고 있을 때 웨일스가 인터뷰한 혁명가 가운데 조선인 김산이 있었던 것이다. 평북 용천 출신의 김산은 소년시절 3.1운동에 참여하지만 좌절을 겪고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베이징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어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김산은 1925년 가을 당시 중국혁명의 근거지였던 광저우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6년 봄에는 김원봉, 김성숙과 함께 분파주의와 파벌주의를 청산하고 통일된 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한국인 혁명가들의 동맹체인 조선혁명청년연맹의 결성을 주도했다. 그는 연맹의 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에는 중앙위원이 되었다. 1927년에 김산은 중국인들과 함께 광둥 코뮌에 참여했다. 그러나 3일 만에 중국국민당의 공격을 받아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철수했다. 그 후 하이루펑 혁명재판소 7인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다가 1929년 하이루펑 소비에트가 국민당 측에 점령되자 탈출했다.


1929년 말 중국공산당 베이징 시위원회 조직부장이 되었다. 이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조직사업 및 지린·안둥 지역에서 중국과 조선 양국의 항일혁명운동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1930년 11월과 1933년 4월 2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에 체포·석방되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 스파이로 오인 받아 중국공산당에 복당하지 못했다.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한 김산은 옌안의 군정대학에서 홍군을 가르치고 있었다. 웨일스는 두 달 동안 22차례에 걸쳐 김산을 인터뷰하여 이를 바탕으로 김산의 자서전 《아리랑》을 완성했다. 《아리랑》이 웨일스와 김산이 공동 저자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가 김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죽음이었다. 1938년 중국 공산당이 김산을 반혁명죄와 간첩죄로 처형한 것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난징이 함락된 이후,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된 웨일스는 남편과 함께 필리핀으로 가 《아리랑》을 집필했고 1941년 미국에서 이 저서를 출판했다. 


1938년 처형된 김산은 1983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조치로 복권되었다. 2005년 우리나라 정부는 김산(장지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같은 해 님 웨일스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함으로써 그가 《아리랑》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와 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린 공로를 기렸다.


이 책은 1920~1930년대의 격변하는 동아시아에서 지식인과 혁명가들의 활동과 좌절,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김산은 공산주의자 혁명가이자 조선인 독립운동가였다.


3.1운동의 좌절 후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서구 제국주의에 실망하고 마르크시즘을 사상의 무기로 삼아 독립운동의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3.1운동의 계기가 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되는, 또 다른 제국주의의 허구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20년대 일명 마르크스 보이, 이들이 조선에서, 만주에서 혁명과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김산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던 소년은 평화적 시위가 피로 물드는 것을 목도했다. 민족자결주의는 허망한 메아리였고 심지어는 배신이었다. 


1919년 어느 가을날, 조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조국을 원망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조선은 평화를 원했으며,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저 ‘평화적 시위’가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난 이후에……. 조선은 멍청하게도 세계열강을 향하여 ‘국제정의’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의 약속 이행을 애원하고 있는 어리석은 늙은 할망구였다. 결국 우리는 그 어리석음에 배반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조선 땅에서 태어나서 수치스럽게도 이와 같이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 버렸을까? 나는 분노했다. 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모두가 싸우고 있었고, 또한 이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아리랑》 중에서


낯선 땅 중국에서 조선인 청년들은 총을 들고 싸웠고, 폭탄을 투척하고 체포되고 고문당하면서도 목숨을 건 독립투쟁을 이어나갔다. 1928년 코민테른 12월테제에 의해 1국1당 정책이 당의 노선으로 채택되는 바람에 중국에서 활동했던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일본과의 싸움뿐만 아니라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속에서도 많은 조선인 활동가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죽어갔다. 국민당군에 의해 중국인 뿐 아니라 조선인 활동가들도 학살당했다. 그러나 일본과 국민당이라는 2개의 적에 포위된 중국 공산당 또한 조선인 동지들 일부를 간첩으로 의심하고 심지어는 처형까지 했다. 김산 또한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활동이 중단된 적도 있었고, 결국에는 중국 공산당원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3.1운동의 상처 속에서 조국을 떠났던 소년은 상하이에서 베이징에서 광둥에서 옌안에서 죽을 때까지 혁명의 전선에 있었다.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된 일생이었다. 같이했던 동지들과 친구들이 죽어가고 간첩으로 몰리는 억울한 상황에서도 김산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변혁에 대한 열망, 역사의 발전에 대한 확신을 놓지 않았다. 


3.1운동은 '독립'에 대한 호소였지만, 소년은 거기에서 나아가 새로운 세상이라는 진정한 해방'의 꿈을 그리면서 생을 바쳤다. 그래서 《아리랑》은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했던 한 인간의 궤적이자 역사를 증언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양정심 news@jeju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