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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프레시안] 도쿄에서 "조선독립"을, 미국에 "굿바이" 외친 '풍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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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6-09 10:37 조회2,7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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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탄에 쓰러진 풍운아 여운형과 '제3의 길'

'탕 탕 탕!' 1947년 7월 19일 한 승용차가 혜화동 로터리 코너를 돌기 위해 서행을 하는 순간 한 청년이 차도로 뛰어들며 총을 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은 '풍운아' 몽양 여운형(1886~1947)이었다.

큰 키에 당당한 체격, 잘 생긴 얼굴에 뛰어난 패션 감각, 탁월한 언변에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국제적 감각, 모두를 친구로 만드는 친화력, 만능 스포츠맨 등 한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장점을 거의 모두 갖추었던 몽양은 해방 이후 10여 차례의 테러에도 살아남았지만 결국 극우청년의 총탄에 이렇게 쓰러졌다. 그와 함께 해방 정국에서 극우도 극좌도 아닌, '좌우합작'과 '중도(정확히 표현해, 중도좌파)'의 '제3의 길'도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전설적인 동경 제국호텔 연설 등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던 몽양은 해방 당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대중정치인이었지만, '좌파'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이승만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극우 정권들을 거치며 잊혀졌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로 서훈도 받고 기념사업도 시작됐지만, 여전히 시대적 명성과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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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쓰러진 혜화동 로터리에는 그의 서거 70주년을 맞아 2017년에 설치한 서거 현장 표시석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잊힌 그의 존재처럼, 이 표시석도 그 앞에 주차하고 있는 배달 오토바이들에 가려, 지나가는 사람들조차도 그 존재를 의식하고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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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생존권은 신성한 것이다. 시대의 조류는 조만간 인간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 이 과거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국가도 개인도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양수리에서 20분 정도 달려 양평군 신원리 묘골의 오솔길을 올라가다 보면 바위에 쓴 글이 나타난다. 여운형이 노비를 해방하자 주변의 여러 양반들이 그를 비판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 때가 한일합방 전인 1908년이고 몽양의 나이가 불과 22살이었으니, 그의 선각적 사고를 보여주는 글이다. 몽양의 어록들을 새겨놓은 이 길을 따라가면,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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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은 이곳 묘골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할아버지가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꿨다고 해서 호를 '꿈속의 태양'이라는 뜻의 몽양(夢陽)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근대식 교육을 받고 기독교인이 됐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를 세워 전도를 했고 노비들을 해방했다.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해 중국으로 유학을 갔고,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3?1운동을 조직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생기자 외무부차장으로 활동했다.
 

"우리민족이 생명을 걸고 주야분투하는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과 그 의의를 밝히고자 나는 이곳에 왔다 (…) 주린 자는 먹을 것을 구하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만이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 해방, 부인 해방, 노동자 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 우리의 건설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을 다스리는 국가일 것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대한민족의 절대적 요구요, 세계 대세의 요구다." 

몽양의 독립운동 하이라이트는 1919년 적지인 동경에서 기자 등을 모아놓고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사자후를 토한 제국호텔 연설이다. 3?1운동에 놀란 일본은 여운형을 일본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초청을 한 것인데, 몽양은 이 연설로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널리 알림으로써 일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를 초대한 하라 내각은 사방에서 비판을 받아 붕괴됐고, 두고두고 '여운형 내각'이라는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여운형은 이처럼 '최초의 한류 정치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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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이 생명을 걸고 주야분투하는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과 그 의의를 밝히고자 나는 이곳에 왔다 (…) 주린 자는 먹을 것을 구하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만이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 해방, 부인 해방, 노동자 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 우리의 건설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을 다스리는 국가일 것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대한민족의 절대적 요구요, 세계 대세의 요구다." 

몽양의 독립운동 하이라이트는 1919년 적지인 동경에서 기자 등을 모아놓고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사자후를 토한 제국호텔 연설이다. 3?1운동에 놀란 일본은 여운형을 일본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초청을 한 것인데, 몽양은 이 연설로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널리 알림으로써 일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를 초대한 하라 내각은 사방에서 비판을 받아 붕괴됐고, 두고두고 '여운형 내각'이라는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여운형은 이처럼 '최초의 한류 정치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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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설에서 그는 단순히 독립의 필연성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독립국가의 성격을 '민주공화국'으로 명확히 했다. 많은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지만, 이 이상으로 놀라운 것이 있다. 그가 '민족해방', '노동자해방'뿐만이 아니라 '여성해방'도 거역할 수 없는 세계사적 흐름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10년대에 여성해방을 주장했던 선각자, 즉 '남자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식민지 해방에 적극적인 러시아 혁명정부에 감동을 받고 소련을 방문해 레닌, 트로츠키 등을 만났고 국제공산당, 고려공산당 등 공산당 운동에 참여했다. 1929년 8월 초, 서울역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몽양이 압송되어 온다는 보도에 그를 보러 나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평소 스포츠광인 몽양이 상하이 야구장에 야구 구경을 갔다가 일제에 잡혔다는 사실이다(이 이야기를 읽고 야구광으로 유신 시절 잘 도망을 다니다가 좋아하던 야구를 보기 위해 동대문운동장에 갔다가 경찰에 잡히고만 한 선배가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몰려든 군중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몽양을 용산역에서 빼돌렸다.

3년형을 받은 몽양은 2년 8개월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이를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경쟁하는 3대 일간지로 키웠다. 그는 조선체육회장에도 취임해 조선청년들의 체력 단련에도 신경을 썼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참가를 고민하던 손기정에게 참가를 설득했고 그가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다. 동아일보가 이를 모방해 실으면서 두 신문 모두 정간을 당했다. 

"곧 일본은 패망할 것입니다." 1942년, 몽양은 김성수 등과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을 듣고 일본의 패망을 알게 되어 이를 이야기하고 다니다가 체포됐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상전향과 학도병 강연회 참석 등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했고, 1943년 7월 신경쇠약 등 건강상의 이유로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석방 후 신경쇠약으로 입원했고 일본 검사가 전향서에 서명을 하지 않을 경우 다시 감옥에 넣겠다고 위협하자, 그의 묵인 아래 가족들이 대신 전향문에 서명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해방 후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1944년 전국적으로 건국동맹을 조직하는 등 해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러시아군이 청진에 상륙하자, 패망 후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일본이 여운형을 불러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안전 귀국을 부탁하자 정치범 즉각 석방, 주체적 치안담당 등 5개 조건으로 행정권, 치안유지권을 인수했다. 이는 이후 일본군과 관리들이 포로 대우를 받은 중국 동남아에 비해 잘못된 협상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8월 15일 몽양은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가 조봉암 등의 석방을 환영했고, 그동안 준비해온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으로 전환시켜 행정권, 치안권을 행사했다. 중앙고등학교를 올라가는 계동 골목 입구에 있는 현대건설 사옥에서 조금 올라가면 보헌빌딩이란 작은 건물이 나온다. 건준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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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합니다."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사회를 보고 있던 여운형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자신을 부주석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설립을 선포했다. 건준은 좌우가 모두 참여한 조직으로 각 지역은 이를 지역통치기구인 '인민위원회'로 발전시켰다. 

한국정치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역작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국혁명은 시작됐고 건준에 이은 인민위원회는 '사실상의 정부'였다고 썼다. 그 대표들이 건국을 선포한 것이다. 그 역사적 현장인 경기여고는 이제 헌법재판소로 바뀌었다. 그 앞에 서자 해방 공간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했던 몽양의 몸부림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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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한국에 도착한 미군정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고 불법화시켰다. 이후 몽양은 미군정 하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활로를 모색해 나갔다. 몽양은 한 때 공산당에도 깊이 관여했지만, 이는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고, 해방 후 그는 기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중도좌파'의 노선을 추구했다. 

"나는 전체주의와 독재에 반대"하기에 공산당과 선을 그으며 "사회주의적 조선을 신봉한다." 그는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는데, 당의 노선에 대해서도 "일제 통치 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소수 친일파를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 사업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농지개혁에 대해서도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달리 '유상매입, 무상분배'를 주장했다.

그는 대중적 인기가 높았지만, 이승만과 친일 지주들의 정당인 한민당 등 극우 세력과 손을 잡은 미군정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는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몽양은 김구가 이끌던 충칭의 임시정부가 정통성이 있다는 '임정 법통론'에 대해서도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들이 다수인데 안전지대인 해외에서 30년간 지리멸렬하던 조직은 국내에 기반이 없다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김구와도 사이가 아주 나빴다. 

뿐만 아니라 대중적 인기와는 대조적으로 박헌영과 같은 탄탄한 조직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는 웅변가였지 조직가는 아니었다. 그 결과 자신이 만든 조선인민당이 위장 입당한 공산당 계열 당원들의 반란으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과 통합을 의결하고 말았다. 몽양은 이에 반발해 백남운과 함께 사회노동당을 만들었지만 남로당의 파괴 공작으로 곧 해체됐다. 몽양은 혼자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이후에도 그는 좌우합작을 주장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대해 "그 결과는 민족분열"이기 때문에 "결코 반대"라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이는 극우세력들을 자극했고, 그의 좌우합작 노력은 혜화동에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만났으니 'How do you do?'라고 인사할 것이고 둘째는 'Thank You'라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Good Bye!'가 있을 뿐이다." 

혜화동 로터리 여운형 서거지 표시석 앞에 서자, 그의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바위에 새겨져 있는 그의 말이 생각났다. 해방 직후 연합국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가 답한 이 말은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이 갖고 있던 생각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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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련 등 점령국, 나아가 이승만을 비롯한 극우파들의 생각은 달랐다. 앞으로 '미군정'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남한으로 이야기를 국한하자면, 미국은 'Good Bye'가 아니라 친미적인 반공정권을 만들고자 했다. 이 점에서 여운형은 당시의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몰랐던 '나이브한 민족주의자'였다. 미국에서 필요했던 것은 'Good Bye'도 여운형도 아니고, 친미적 반공정권, 그리고 친일 경찰을 동원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만들어줄 이승만이었다. 

그의 중도좌파적인 정치노선, 좌우합작의 노선은 좌우로 나뉘어져 사생결단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해방 공간에서 '가장 바람직한 노선', '가장 현실적인 노선'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미소의 한반도 정책,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의 힘의 관계 등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기본적으로 현실성이 없었던, '낭만주의적인 이상론'에 불과했다. 미국이 우리에게 필요로 했던 것은 "How do you do?", "Thank You" 다음에 "Good Bye!"가 아니라 "분부만 내리십시오"라는 의미가 담긴 "Yes Si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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