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가 만난 어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성토
[오마이뉴스 김병기 기자]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 김병기
"자유한국당은 일본의 경제침탈에 이성적으로 대응하자고 하지만, 그건 투항주의입니다. 일진회 무리들이 일제가 국권을 침탈할 때 근대화된 일본에 예속돼 민족의 명줄을 지키자고 주장했어요. 강도가 무기를 들고 집안에 들어와서 망나니짓을 하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우선 강도가 든 무기를 빼앗고 퇴치해야 합니다. 그게 더 이성적이지 않습니까."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76)은 단호했다. 일본의 도발도 문제이지만, 국내에서 이에 맞장구치는 세력의 본질을 과거 반동의 역사의 한 장면을 끄집어내 명쾌하게 정의했다. 김 전 관장은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의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는 현재 진행형인 범죄 속에서 과거 청산하지 못한 범죄와 이에 저항했던 애국의 정신을 소환했다.
"친일에 탯줄을 대고 군사독재의 모유를 먹고 비대해진 수구친일 언론의 작태가 다시 발작했습니다. 최근 불매운동을 감정적 대응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건 애국운동을 욕보이는 매국입니다. 불매운동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강압적으로 떠맡긴 빚을 갚자고 백성들이 술, 담배 끊어가면서 나섰던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과 같습니다. 국권 수호운동이죠."
[거대한 서재] 아파트에 쌓인 장서 3만권
지난 25일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김 전 관장의 자택을 찾았다. 그의 아파트는 장서 3만 권을 보유한 작은 도서관이다. 현관부터 책이 압도한다. 신발장을 개조한 책장의 책이 천장까지 빼곡하다. 화장실과 주방의 벽을 뺀 거실과 방의 벽이란 벽은 책으로 도배되어 있다. 거실 바닥에도 책장에 못 넣은 책이 산처럼 쌓여 있다.
"아니, 2년 전에 왔을 때보다 책이 훨씬 더 많아졌네요."
한 마디 던지자, 그는 "그동안 2000여 권 더 사들인 것 같다"면서 "우리 집에 와서 아파트 바닥이 무너질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부러 책을 바닥에 분산해서 놨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13층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으면 남한강의 시원스러운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곳에 앉지 못하고 식탁 위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그 사이 김 전 관장이 책장 어딘가에서 꺼낸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어제 나온 책입니다."
▲ 민주노총, 전농, 한국진보연대 등 시민단체 대표들이 24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역사왜곡·경제침략·평화위협 아베규탄 시민행동’을 결성해 다가오는 7월 27일 부터 매주 촛불 집회를 열기로 발표하고 있다. ⓒ 이희훈
붉은 색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니 <항일의 불꽃 의열단>(두레 출판)이었다. 2008년에 펴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평전>이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책에는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까지 포괄하면서 20여 년간 독립운동의 행적을 담았다. 올해가 의열단 창단 100주년이고, 그는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이기도 하다.
그는 1주일 뒤에 나올 책의 표지 시안도 보여줬다. <매천 황현 평전>이다. 1996년 <박열 평전>을 출간한 이래 23년 만에 40번째 펴내는 평전이다. 그의 아파트에 쌓여 있는 장서들은 역사의 수많은 사건을 탐구하기 위한 지독한 독서의 징표이자, 역사 속에서 평전의 인물을 꺼내 독자들 앞에 오롯이 세우기 위한 자양분인 셈이다.
그는 이명박 정권 초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실상 독립기념관장직을 박탈당하면서부터 독서와 집필의 강도가 더 세졌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는 할 일이 없어서 책만 썼습니다. 강의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정권의 눈치를 본 거죠. 강의 2~3일 전에 '사정 때문에 나중에 연락드리겠다'고 한 뒤 소식이 없었죠. 한 대학은 내게 강좌를 맡겼다가, '다음 학기부터 하자'고 한 뒤 연락을 끊었습니다. 분노가 치밀고 좌절감도 일었죠. 대신 많은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산이 유배돼서 18년간 강진에서 많은 저서를 낼 수 있었듯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에 낭인 생활을 하면서 많은 책을 썼다"면서 "지식인들을 핍박하면 종말이 좋지 않다는 교훈을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들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아픔이 컸다"고 말했다.
[역사의 반복]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박근혜
그는 요즘도 매일 수십 장의 원고를 쓴다. 최근 <오마이뉴스>에 매일 연재하고 있는 평전은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이다. 지난 5월에 시작한 이 평전은 7월 30일 77회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바로 '운암 김성숙 평전'을 시작한다. 그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은 손으로 직접 원고지에 쓰면서 남은 흔적이다.
이런 그가 인터뷰에서 하는 말은 원고지에 꾹꾹 눌러쓰는 글과 같았다. 논리가 명쾌하고 근거도 명확했다. 적절한 단어와 비유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잠시 말을 멈췄다. 머릿속에서 원고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는 펜으로 빈칸을 채우듯 말을 이었다.
"노회찬 전 의원의 주장처럼 외계인이 지구를 쳐들어오면 적대적 국가였던 나라들도 우선 합심해서 외계인을 막아야 합니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부가 내키지 않다고 해도 일본의 경제 침탈 억지에 마치 일본 극우신문이 하는 듯한 제목의 글을 쓰는 국내 수구언론들의 모습을 보면 과거 친일의 '피는 못 속인다'는 격언이 새삼 떠오릅니다."
김 전 관장은 "이봉창 의사가 일왕 마차에 포탄을 던졌을 때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의 1932년 1월 10일 1면 톱기사 제목은 '천황폐하 무사환궁, 범인은 선인(조선인)'이었다"면서 "당시 민족 지사를 '범인'으로 매도하고도 지금도 '민족지' 운운하면서 일본 경제침탈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중성을 국민들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과거 우리의 상전노릇을 하려고 덤비는 일본"을 보면서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원죄를 떠올렸다고 한다.
"지금 불거진 한일 관계는 1965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후유증입니다. 본질은 하나도 처리를 하지 못하고 가조인 형태로 맺어서 후유증이 도처에서 불거지고 있어요.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엉터리로 체결하니까 실천도 못하고 오히려 일본에 약점만 잡혔습니다.
최근 일본이 엉뚱하게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배상 판결에 시비를 걸고 있는데, 박정희 정권 때 맺은 한일기본협정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이 대한민국에 3억 달러의 배상금을 줬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협정문에는 '독립 축하금'이라고 적었습니다. 그 표현을 고집한 건 일본입니다."
[청산 없는 역사] 배상금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 받은 까닭
김 전 관장은 "결국 35년 동안 한반도를 불법 지배한 일본은 우리에게 한 푼도 배상하지 않았다"면서 당시 일본이 '배상금' 표현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51년 9월 8일 제2차 세계대전을 종료하면서 연합국과 일본이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우리나라는 제외됐습니다. 일본은 피점령국가들에 배상금을 주기로 했는데, 이승만 정권이 맹목적으로 반일 감정을 정치에 이용만하면서 기회를 놓친 겁니다. 결국 일본은 배상 책임이 없다고 억지를 썼고, 박정희가 그걸 받아서 무상으로 3억 달러, 재정 차관 형식으로 2억 달러를 10년 거치 상환 조건으로 받았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고이율이었죠."
김 전 관장은 "최근 일부 정신 나간 정치인들은 우리가 그 돈을 받아서 경제 성장을 했기에 적대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점령했던 버마나 필리핀 등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여해서 독립 축하금이 아닌 4~5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받았다"고 말했다.
"일본은 우리를 35년 강점하면서 엄청난 국부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고 근대화 과정을 짓밟았습니다. 그 죄과를 (박정희 정권은) 3억 달러의 '독립 축하금'으로 얼버무렸습니다. 거기에다가 위안부, 독도, 문화재, 사할린 지역 교포와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문제 등을 하나도 거론하지 못하고 한일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는 "그때 이런 문제를 청산하면서 국교 정상화를 했어야 하는데 을사늑약이나 한일합병조약 등도 원천무효시키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지금 일본이 정치적, 역사적으로 사죄도 하지 않고 오만방자하게 나서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