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죄와 반성은 곧 지배구조에서의 낙오와 퇴출”을 의미
설립자의 후손이 여전히 학교의 전권을 쥐고 있어서일까. 뉴스타파는 이번 취재과정에서 학교 안에 설치된 설립자의 동상을 수없이 확인했다. 어디에도 설립자의 친일행적을 기록해놓은 곳은 없었다.
학교 설립 50년, 60년, 100년때마다 내놓는 ‘학교사’도 확인했지만 설립자의 친일 행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대학을 찾지 못했다. 친일 행적을 아예 기록하지 않거나, 일부 학교는 독립운동가처럼 미화하기도 했다.
동덕여대가 2009년 발간한 <동덕 100년사 자료집>에는 “설립자 조동식은 학교가 어려움에 처할 때 불굴의 의지로 이를 극복하여 오늘의 동덕이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라고만 서술했다. 일제 강점기 조동식의 친일행적은 나오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에 조동식은 “조선 청년 누구나가 몸소 즐거이 나라를 위해 총칼을 잡아야 한다”고 학도병과 징병을 독려하고 침략전쟁을 선동했다.
성신여대가 1989년 펴낸 <성신50년사>에는 설립자 이숙종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운정 리숙종 선생이 그 어려운 시대에 민족 교육기관인 성신학원을 세워 초지일관으로 뜻을 굽히지 않고 성신교육을 해왔다. (중간 생략) 개교 당시 리숙종 교장은 일본말로 교가를 부를 바에야 차라리 안 부르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교가를 짓는 일조차도 하지 않았다.
2015년 경성대는 <경성대 50년사> 편찬했다. 2009년 김길창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지 6년이 지난 뒤었다. 그러나 여전히 김길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순산(김길창)은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국가의 독립과 영광은 일시적인 저항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그는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케 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친일거두 박흥식. 그는 국방헌금을 헌납해 일제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특히 침략전쟁을 위한 전투기를 생산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사장까지 지냈다. 2015년 광신고가 펴낸 나온 <광신 110년사>에는 “일제의 강요로 (비행기 회사를) 설립했다”고 주장하고 “이 회사의 설립으로 많은 청년들과 화신계 사원들이 징용에서 면제되어 인재를 보호할 수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양심있는 교수들은 학교사 편찬위원회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학)권력이 있는데, 설립자의 친일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저희가 이제 덕성 100년사를 쓰기 위해 다른 대학교는 어떻게 쓰냐고 물어봤어요. 이미 쓴 대학도 있고, 써야 할 대학도 있는데,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이사회에서 원고를 보자고 한다든지. 어느 대학은 (이사회에) 보여줬대요. 그런데 보여주는 순간 못 나왔대요.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하니까 누더기가 되는 거죠. 지금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인데 그에 맞서서 글을 쓴다는 것은 힘들죠. 그러니까 대부분 안 쓰죠. 양심있는 학자들은 아예 안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일 사학설립자들과 그 후손들로부터 사과와 참회, 이를 통한 진정한 친일청산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한상권 교수는 “반성하지 않는 친일파를 탓할 게 아니라, 그들을 반성의 무대로 이끌어내지 못한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반성은 기득권 지배구조에서 낙오”를 의미한다며 이렇게 답변했다.
당사자로선 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녕 박사만이 반성을 했죠. 그 이외에는 거의 반성을 하지 않죠. 왜냐면 우리 한국사회 지위 구조하고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친일세력들이 해방 이후에 한국사회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런 지배구조 속에서 자기가 반성한다는 건 곧 거기서 떨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우리는 한 번도 단죄를 한 적이 없다 보니, 맺은 것도 아니고 안 맺은 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상황이다. 국가가 지향해야 될 이상의 가치를 설정하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지난 6월 18일. 성신여대 설립자 이숙종의 34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날 황상익 이사장은 “진정한 추도는 고인이 살아서 하지 못한 참회와 사죄를 대신 하는 것이 포함돼야 한다”며 추도사를 읽어 나갔다.
이날 추도사를 통해 황상익 이사장은 설립자 이숙종과 초대총장 조기홍이 민족 앞에 저지른 친일반민족행위와 이숙종의 조카 심용현 전 이사장이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집단학살 행위를 70년 만에 대신 사죄했다.
학원이 제 구실을 하려면 지난 시대의 잘못과 과오들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고 사죄해야만 합니다. 역사와 진실을 외면한 채 미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성신학원 이사장 자격으로 친일반민족행위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을 모든 분들과 국민, 그리고 성신학원 구성원들께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중략)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의 현장 책임자인 심용현 전 이사장은 결코 성신학원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심용현 전 이사장과 관련해서 발생한 성신학원의 모든 과오에 대해 학살 피해자들과 유족들 에게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며칠 뒤, 뉴스타파 취재진을 만난 황상익 이사장은 추도사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분(이숙종)이 살아계실 때 스스로 사과하고 속죄할 수 있었으면 그걸로 끝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분을 기억하고 기리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그분을 위해서도 또 그분에 의해 피해를 본 분들이 있으면, 피해자에 대해서도 해원할 수 있는 기회와 피해자와 피해자의 유족과 더불어 고인의 영혼의 안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전례가 없는 이번 공개 사죄가 독재와 친일로 얼룩진 대학의 과거사를 극복하는 불씨가 될 수 있을까. 취재진은 공개 사죄 이후 주변의 반응은 어땠는지 물었다. 황상익 이사장은 웃으면서 “아직 사회적 반향이 큰 것 같지 않다”며 이렇게 답했다.
저로서는 성신학원, 한 학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일뿐만 아니라 반성을 토대로 우리 한국 사회, 한국의 학원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런 중요성에 비해서 사회적 관심이 아직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황상익 이사장의 공개 사죄 발언을 보도한 매체는 온라인 언론 한, 두곳에 불과했다.
데이터: 최윤원, 임송이
시각화: 임송이
가계도: 신학림 전문위원
촬영: 최형석, 신영철, 정형민
자료조사: 최유리, 민영빈
웹디자인: 이도현
타이틀 CG: 정동우
편집: 윤석민
취재: 박중석, 최윤원, 강혜인, 강민수, 김새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