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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황야', '혁명' 등 잡지 만들며 일제와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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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7 18:48 조회7,6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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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8회]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수단가치로 인식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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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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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1920년대 중반기 중국 베이징과 일본 도쿄의 대학가는 각종 사상과 철학, 이데올로기가 난발하는 '자유의 화원'이었다. 불행하게도 조선의 서울은 식민지의 중심이어서 자유와 학문은 커녕 탄압과 검속의 우울한 지대였다. 
  
김성숙은 전통유학의 어린시절에 이어 한때 기독교에 호기심을 가졌고, 5년여 동안 불승이 되고,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나키즘에 심취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에 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불변의 중심가치는 조국의 독립을 전취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에 있었다. 따지고 보면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수단가치로 인식되었다. 망명시절과 해방 뒤의 행적이 이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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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이 1923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수학한 민국대학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대단히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성품이었던 그는 민국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재학 중 학업을 하면서 여러가지 일에 참여했다. 하나같이 일제와 대결하는 독립운동 관련이었다. 
  
김성숙은 베이징에 망명한 불교계 유학생들과 함께 북경불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북경불교유학생회'는 사무소를 북경 소경창(小經廠) 16호에 두고 문예부ㆍ체육부ㆍ정리부를 두었다. 북경불교유학생회는 친목도모ㆍ학술연구와 아울러 자유ㆍ평등의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북경불교유학생회의 성격은 단순한 불교 학술단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을 띤 단체였다. 1924년 2월 북경불교유학생회는 기관지 『황야』를 발간(격월간) 했다. 사무실은 베이징세계어전문학교 안에 두고, 출판비용은 회비로 충당했다. 주요 집필자는 김성숙ㆍ김봉환ㆍ윤종묵ㆍ차응준ㆍ김규하ㆍ김천ㆍ한봉신ㆍ김봉수 등이었다.

『황야』는 매호 40~50페이지 분량, 당시 베이징 한인사회에서 발행한 출판물 중에서 가장 짜임새 있는 잡지로 평가되었다. 『황야』의 내용은 철학ㆍ단편소설ㆍ시ㆍ문학일반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야』는 김성숙이 1925년 베이징을 떠날 때까지 계속 발간되었다. (주석 6)
 
이와 관련 님 웨일즈는 『아리랑』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923년에 다른 젊은 승려 다섯 명과 함께 김충창은 자기들의 정치활동을 해나갈 자유가 있는 북경으로 건너갔다. 이 여섯 명은 문학단체를 만들고, 『황야(荒野)』라는 잡지를 내었다. 그 내용은 철학, 시, 단편소설, 문학 일반에 걸친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김충창을 포함하여 세 명의 젊은 승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나머지 세 명은 혁명이란 도무지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하면서 금강산으로 되돌아갔다.
 
1923년 겨울 공산당청년동맹에 가입함과 동시에 나는 김충창 외 여덟 명의 동지와 함께 힘을 합하여 북경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였다. 나는 격월로 발간되는 이 학생잡지의 세 명의 편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잡지는 공산당 동조자, 좌익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한테서 지지를 받았다. 이 잡지는 서른 두 페이지 짜리로, 창간호는 팔백 부를 찍었는데 육개월 이내에 삼천 명의 고정독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 잡지는 국내, 만주, 시베리아, 호놀룰루, 캘리포니아, 유럽에 있는 한국학생들에게 발송되었고, 1926년까지 계속해서 발간되었다.
 
김충창은 이 잡지의 주필이었으며 이 잡지를 위해 수많은 주옥같은 논문을 썼다. 이 논문들은 내 사상에 커다란 감화를 주었다. 북경에는 한국문자 인쇄소가 없었다. 그래서 김충창은 전 지면을 자기 스스로 판을 짜서 이것을 석판인쇄하였다.
 
이 작업을 하느라고 그는 거의 눈이 멀었다. 그래서 북경협화의과대학(北京協和醫科大學)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주석 7)

주석
6> 『연보』, 340쪽, 문장 정리.
7> 님 웨일즈, 앞의 책, 115~1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