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8회]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수단가치로 인식돼
[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황야』는 매호 40~50페이지 분량, 당시 베이징 한인사회에서 발행한 출판물 중에서 가장 짜임새 있는 잡지로 평가되었다. 『황야』의 내용은 철학ㆍ단편소설ㆍ시ㆍ문학일반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야』는 김성숙이 1925년 베이징을 떠날 때까지 계속 발간되었다. (주석 6)
이와 관련 님 웨일즈는 『아리랑』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923년에 다른 젊은 승려 다섯 명과 함께 김충창은 자기들의 정치활동을 해나갈 자유가 있는 북경으로 건너갔다. 이 여섯 명은 문학단체를 만들고, 『황야(荒野)』라는 잡지를 내었다. 그 내용은 철학, 시, 단편소설, 문학 일반에 걸친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김충창을 포함하여 세 명의 젊은 승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나머지 세 명은 혁명이란 도무지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하면서 금강산으로 되돌아갔다.
1923년 겨울 공산당청년동맹에 가입함과 동시에 나는 김충창 외 여덟 명의 동지와 함께 힘을 합하여 북경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였다. 나는 격월로 발간되는 이 학생잡지의 세 명의 편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잡지는 공산당 동조자, 좌익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한테서 지지를 받았다. 이 잡지는 서른 두 페이지 짜리로, 창간호는 팔백 부를 찍었는데 육개월 이내에 삼천 명의 고정독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 잡지는 국내, 만주, 시베리아, 호놀룰루, 캘리포니아, 유럽에 있는 한국학생들에게 발송되었고, 1926년까지 계속해서 발간되었다.
김충창은 이 잡지의 주필이었으며 이 잡지를 위해 수많은 주옥같은 논문을 썼다. 이 논문들은 내 사상에 커다란 감화를 주었다. 북경에는 한국문자 인쇄소가 없었다. 그래서 김충창은 전 지면을 자기 스스로 판을 짜서 이것을 석판인쇄하였다.
이 작업을 하느라고 그는 거의 눈이 멀었다. 그래서 북경협화의과대학(北京協和醫科大學)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주석 7)
주석
6> 『연보』, 340쪽, 문장 정리.
7> 님 웨일즈, 앞의 책, 115~1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