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6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할 때 '이념적 개안'을 하게 되었다"
▲ 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일제는 잔인하고 가혹했다.
비무장, 비폭력의 만세시위 민중을 총칼로 제압하고 닥치는대로 살해ㆍ투옥ㆍ방화의 야만성을 드러냈다. 기록에 나타난 숫자만으로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만 5,961명, 피검자 5만 2,700명, 불탄 종교기관 47개소, 민가 715채 등이다. 당시 1,800만 인구에서 볼 때 실로 엄청난 희생이었다.
김성숙은 피검되어 1919년 5월 19일 출판법위반혐의로 기소되고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2개월의 징역형,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고등법원에서 상고심이 기각됨으로써 8개월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수형생활을 하고, 만기 한 달을 앞두고 1920년 4월 28일 가출옥하였다.
앞당겨 출감한 것은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불교의 승려인 점을 감안하여 '은전'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수형기록에 따르면, 김성숙의 신장은 167㎝, 본적 경기 양주 진접 당평 255, 출생지와 주소도 같은 것으로 되었다. 그의 수인번호는 1528번이다.
▲ 봉선사 전경. 김성숙은 1916년 불교에 입문하여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았다. 봉선사 전경. 김성숙은 1916년 불교에 입문하여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았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출감하여 봉선사로 돌아온 김성숙은 1년여 동안 불사(佛事)에 전념하는 한편 불교의 자주성 확립을 위해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불교계의 동반들과 뜻을 나누었다.
1921년 12월 20일 서울 간동의 불교청년회관에서 조선불교유신회가 창립되었다. 불교를 신봉하는 청년들이 항일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불교를 개혁하려고 조직한 불교혁신운동단체였다. 김성숙은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30본산 주지 가운데 독립성이 있는 스님을 찾아 세력을 키우고자 노력했다.
이후 조선불교유신회는 1923년 종수원(宗數院)을 설립하여 총독부가 내린 사찰령을 미끼로 횡포를 일삼는 교무원(敎務院)과 맞서고, 또한 총독부에 사찰령의 폐지를 요구하며, 전통적인 조선 사찰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착취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 김성숙 수형기록표 김성숙 수형기록표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은 투옥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3ㆍ1시위에 앞장서고 8개월이란 짧지않는 기간 옥살이를 하면서 조국독립과 불교개혁의 과제를 일체화하였다. 그리고 보다 폭넓은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한다. 사회개혁운동 역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한 것이다.
김성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상적인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되는 인물을 만났다. 김사국(金思國, 1892~1926)이다. 그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승려생활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 후 만주ㆍ러시아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귀국하여 1919년 4월 서울에서 '국민대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이때 김성숙과 만나게 되었다. 그 역시 1920년에 출옥하였다.
두 사람은 출옥 뒤에도 자주 만났다. 김사국은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하고 4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 11월 도쿄에서 박열 등과 흑도회 결성,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등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1923년 봄 '자유노동조합사건'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에서 서울파 공산주의그룹 간도총국을 결성했다. 그해 사회주의 교육기관 동양학원을 설립했다. (주석 5)
▲ 불교유신회 순강 보도기사(동아일보 1922년 2월25일). 김성숙은 1921년 12월20일 창립된 불교유신회에서 활동하였다. 불교유신회 순강 보도기사(동아일보 1922년 2월25일). 김성숙은 1921년 12월20일 창립된 불교유신회에서 활동하였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님 웨일즈가 '금강산의 붉은 승려'라 한 것은 김사국을 김성숙으로 오인한 듯 하다.
김성숙이 출감했을 즈음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옥중동지' 김사국과 만나 그의 사회주의 사상 및 운동에 공감하면서, 활동범위가 같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22년에는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무산자동맹회는 1922년 3월 21일 서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사상 운동단체이고, 조선노동공제회는 이보다 앞서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운동 단체였다.
김성숙은 충청북도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진상을 조사하여 서울의 조선노동공제회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에 알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에서 활동하면서 김한ㆍ조봉암ㆍ유자명 등과 교유하였다.
"김성숙이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할 당시는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가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한 동기는 단순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주석 6)
김성숙 연구의 물꼬를 튼 언론인 김재명씨는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할 때 '이념적 개안'을 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1년 간의 옥살이 동안 김성숙의 이념적 개안(開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훗날 혁신계 인사로서, 혹은 급진적 정치가로서 평가되는 토대가 이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듯하다. 왜냐하면 출소 후의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볼 때 줄곧 '급진'ㆍ'혁신'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소 직후인 1921년 그는 당시 처음으로 발기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과 노동공제회에 가입하였다. 여전히 승려의 신분으로서였다. 당시 그의 승적은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奉先寺).
이런 연고 때문에 그의 부모는 딸린 가족들과 함께 평북에서 경기도 고양군으로 옮겨왔다. 봉선사의 말사격인 수국사 소유의 논밭을 소작하기 위해서였다. (주석 7)
주석
5> 강만길ㆍ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 사전』, 78쪽, 1996.
6> 『면담 이정식』, 57쪽.
7> 김재명, 「김성숙선생의 묘비명」, 『월간 정경문화』, 1985년 10월호 4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