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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로 격문 만들어 만세운동하다 체포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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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4 18:54 조회10,8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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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5회]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가출옥으로 석방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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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 압송되는 3·1운동 주도학생들   ⓒ 독립기념관 


김성숙은 단신으로 3ㆍ1혁명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봉선사의 여러 승려들과 함께하였다. 양주군은 경기도 타지역보다 이른 시점에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많은 군민이 참여하여 그만큼 희생자도 많았다. 구체적인 연구기록을 소개한다.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현재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 승려인 김성숙ㆍ이순재(지월 스님)ㆍ강원주와 서울 종로에서 약종상을 하는 김석로 등은 서울에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평리 부근의 주민들을 모아 광릉천 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30일로 결정하고 동민들에게 독립만세 시위를 할 것과 동참을 촉구하는 문건을 재작ㆍ배포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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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대표 공판 장면(동아일보, 1920.7.13)   ⓒ 정운현


이들은 조선독립임시사무소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한국도 이 기회에 극력운동을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 문건을 만들었다. 3월 29일 봉선사 서기실에서 약 300매의 유인물을 인쇄하여 승려 강완수 등 2명이 같은 날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부평리ㆍ진벌리 등 부근 4개 동리 민가에 배포하였다.

그리하여 약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김성숙과 이순재는 만세시위운동이 다음날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미리 부평리의 이재일에게 격문의 내용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 김성숙과 이순재의 연락을 받은 이재일은 광릉천시장 만세시위운동 다음날인 3월 31일 광릉천 자갈마당에서 제2차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전날의 만세시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헌병대와 경찰서로 연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제는 시위확장을 막기 위해 헌병을 출동시켜 진압에 나섰다.

그리하여 2차 만세시위운동 주도자 이재일ㆍ김순만ㆍ최대봉ㆍ양상돌 등 8명이 체포되어 김성숙ㆍ이순재ㆍ강완수ㆍ김석로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주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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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혁명 33인 기록화   ⓒ 정운현 


한민족은 국치 9년 만에 거족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마침내 1919년 3ㆍ1독립혁명이 전개되고, 천도교ㆍ기독교ㆍ불교계의 민족대표 33인 명의로 민족의 자주독립이 선포되었다.

봉선사에서 독립운동의 기미를 알고 있었던 김성숙은 승려복 차림으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 선포행사에 참여하고, 이어서 봉선사 승려들과 별도의 성명서를 사찰 내에서 제작했다. 그리고 경기도 각 지역에 독립선언서와 함께 이를 배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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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인 만기출옥(동아일보, 1921.11.5)   ⓒ 정운현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 한위건이 학생을 대표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할 때 김성숙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김성숙은 독립 만세를 부른 후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을 맡아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또 그 성명서를 프린트해서 돌렸다.

 

그는 또 봉선사의 동료 승려인 이순재ㆍ김석로ㆍ강완수 등과 함께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로 격문을 만들었다. 이 격문의 취지는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하기로 결정했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약 200매 분량의 격문을 작성하여 봉선사 인근 마을에 살포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아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공범 7명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주석 4)


주석
3> 이동원, 앞의 책, 46~47쪽.
4>  임혜봉, 앞의 책, 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