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봉선사에서 국치 겪으며 민족의식 길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4 11:05 조회10,718회

본문

[운암 김성숙 평전 4회] 경술국치 이후 불교계의 참담한 소식을 들으며  




e3d3b2ee684b4567f8e4712a24a39c98_1564884251_91.jpg
 

▲ 운암 김성숙선생(출처 : KBS 한국의 유산_운암 김성숙 편)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25&v=nmOcypH0r8c  ⓒ KBS  


혈기있는 청년이 격동의 시기에 절방에서 염불이나 외고 있을 순 없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조선 민중들은 마소와 다르지 않는 노예처럼 살았다. 소수의 매국노ㆍ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을 제외한 조선인들은 모두 비슷했다.

여러 곳에서 은밀히 조국의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김성숙이 의탁하고 있는 사찰은 그 중심지의 하나였다. 

이에 앞서 경술국치 전후 조선불교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각계에 매국노가 있었듯이 불교계도 다르지 않았다.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꾼, 이른바 '매종역조(賣宗易祖)'의 선두자는 강원도 양양 출신의 승려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이다. 

 

그는 1910년 병탄조약 직후 매국노 이용구의 추천으로 알게 된 일본 어용종단 조동종(曹洞宗)의 승려 다케다(武田範之)를 조선불교 원종(圓宗)의 고문으로 추대하고 10월 6일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예속시키는 조약에 조인했다. 

 

당시 원종에는 일진회 회장이자 친일거두인 이용구의 추천으로 일본 조동종의 승려 다케다를 고문으로 앉혔다.

다케다는 일제가 조선을 병합했듯이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병합시키려고 공작을 꾸몄다. 그러던 차에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조동종과의 연합을 적극 추진했다.

그리하여 이회광은 다케다와 함께 그해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불교 조동종과의 연합을 1910년 10월 6일에 조인했다. 이는 한일합병 조인이 있은 지 꼭 45일 만이었다.

나라가 강제적으로 병합이 된 지 45일 만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불교마저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호국불교의 의연했던 전통이 별다른 저항없이 '왜색불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일본 조동종 종무대표자 홍진설상(弘進說上)과 이회광이 조인한 조약은 전문 7개조였다. 이 조약문을 읽어보면 제2항부터 제5항까지가 일본 조동종 위주의 불평등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주석 1)  


e3d3b2ee684b4567f8e4712a24a39c98_1564884319_88.jpg


▲ 봉선사 전경. 김성숙은 1916년 불교에 입문하여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았다.   봉선사 전경. 김성숙은 1916년 불교에 입문하여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았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각급 종교를 손아귀에 넣고자 획책했다. 불교의 경우 1911년 한반도의 전국 사찰을 30개 교구(敎區)로 나누어 본산(本山)을 두었다. (1924년에 구례 화엄사를 포함시켜 31 본산) 서울의 봉은사를 비롯 김성숙이 승려생활을 하는 양주의 봉선사 등 전국 주요사찰이 모두 포함되었다.

사찰의 주지를 조선 총독이 직접 임면하고 본산 산하에 있는 각급 사찰은 주지가 관할토록 하는, 철저한 통제체제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이 땅에 들어온 조선불교는 병탄 1년도 안 되어 일본의 조동종에 예속되고 말았다.

봉선사의 김성숙은 이같은 불교계의 참담한 소식을 듣고 있었다. 봉선사의 주지 홍을초는 행동반경이 대단히 넓은 승려였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만해 한용운, 범어사 승려 김법린 등과 교유하면서 시국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손병희가 오면 김성숙에게 시중을 들게 하였다. 봉선사에서 홍을초를 비롯 손병희ㆍ한용운ㆍ김법린 등이 모여 모종의 거사를 논의하고, 김성숙은 이런 움직임을 체득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를 님 웨일즈는 『아리랑』에서 김성숙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착오인 듯하다.

열여섯 살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기독교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는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같은 열 여섯 살에 집을 뛰쳐나와 금강산에 가서 중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산 한가운데 있는 유명한 유점사(楡岾寺)에서 그는 불교 뿐만이 아니라 현대철학도 연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1919년까지 머물러 있었다. 

이 몇 해 동안에 이 젊은 승려는 일본어를 공부하여 칸트, 헤겔, 스피노자의 저작을 일본어로 읽었다. 그에게 있어서 헤겔은 하늘의 계시자였다. 그래서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열광적으로 심취하였으며 그의 변증법에 빠져들어갔다. 그 당시 아직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

1919년에 김충창은 불교독립당에 들어갔다. 당시 이 당은 약 삼백 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독립에 관한 선언을 공표하였다. 3ㆍ1운동 때 김충창은 마을에 내려가 선전활동을 하였다.

- 물론 가사를 입고서, 당시 그는 스물 네 살이었다. 그는 왜놈에게 서울에서 체포되어 일 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풀려나자마자 그는 '강연단'을 조직하여 선전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주석 2)

주석 

1> 임혜봉, 『불교사 100장면』, 293쪽, 1994, 가람기획.
2> 님 웨일즈 지음, 조우화 옮김, 『아리랑』, 275~276쪽, 동녘,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