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용문사에 이어 봉선사에서 승려생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2 20:54 조회10,743회

본문

[운암 김성숙 평전 3회] 김성숙의 생애를 두고 그나마 가장 안전하고 행복했던 시절  



독립군이 되고자 부모의 땅 판 돈을 들고 봉천으로 가출(家出)하던 김성숙은 어떤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하는 출가(出家)의 신분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첫 번째 맞은 파란곡절의 사연이다. 불교에서 인연(因緣)을 두고, 결과를 내는 친인(親因)은 인, 결과를 내는데 보조되는 것은 연이라고 한다. 즉 쌀과 보리는 그 종자를 인으로 하고, 노력ㆍ눈과 비, 비료 등을 연으로 한다고 풀이한다. 


3974b34c2c27319a334902342ef70081_1564746630_34.jpg
 

▲ 용문사 시절(1916~1918) 풍곡선원 선사께서 태허 스님에게 내리신 글. 용문사 시절(1916~1918) 풍곡선원 선사께서 태허 스님에게 내리신 글.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18살의 김성숙은 용문사의 중이 되었다. 용문사에서 사미계를 받아 태허(太虛)라는 법명을 얻었다.

용문사에는 '여여거사'라는 걸물 승려가 있었다. 김성숙의 민족의식이 싹트게 만든 인물이다.  


여여거사(如如居士)는 유대치(劉大痴)를 말한다.


본이름이 홍기(鴻基)였던 유대치는 백의정승(白衣政丞) 소리를 듣던 초야인물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목대잡이였다. 

 

여여거사는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가림천을 내리자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한양 유씨집안에서는 그가 용문산으로 들어가 토굴을 파고 좌선으로 남은 목숨을 보냈다고 한다. 허물없이 지내는 동지였던 역관 오경석과 같은 나이였으니 1831년생으로 용문산으로 들어간 것은 56살 때가 된다.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ㆍ서광범ㆍ이종원ㆍ이정환ㆍ박제형ㆍ오경석 삼형제ㆍ김영한 형제ㆍ한세진ㆍ이회목 같은 혁명 원둥치들이 다 불자(佛子)였다. 김성숙이 입산하여 태허(太虛)라는 불명으로 중 노릇을 비롯했을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86살이 된다.

좌선으로 한소식 했을 여여거사니 살아있었을 수도 있고, 열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입김이 용문산 언저리에 짙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김성숙이 김충창이라는 이름으로 혁명가 길을 걷게 된 데에 여여거사 입김이 크게 미쳤을 것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주석 3)


김성숙의 생애를 두고 용문사의 승려 기간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이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3974b34c2c27319a334902342ef70081_1564746724_01.jpg
 
▲ 김성숙 봉선사 전문창화강원 사미과 졸업증서 (1917. 7.15) 김성숙 봉선사 전문창화강원 사미과 졸업증서 (1917. 7.15)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은 한문도 알고, 일도 열심히 하였으며, 불경을 배우는 속도도 아주 빨랐다. 용문사에서 그는 2년 반 가량 승려로서의 초보적인 것들을 모두 배웠다. 그러자 용문사에서는 김성숙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로 보내 불교 내전(內典)을 정식으로 배우게 했다.

당시 봉선사에는 홍월초라는 노승이 있었는데, 그 노승이 사실상 김성숙의 스승격이었다. 이 스님은 천도교의 교령인 손병희, 한용운 및 김법린과도 친하였다.

손병희가 오면 노승은 김성숙에게 시중을 들게 해 퍽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손병희ㆍ한용운 등이 3ㆍ1운동을 계획할 때 김성숙은 그 휘하에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3ㆍ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주석 4) 

김성숙은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면서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찰의 사무도 맡아 처리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월초(月初) 거연(巨淵) 스님(1858~1934)이 주석하고 있었다. 그는 월초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1922년 4월 8일 성월(惺月) 일전(一全)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 때 받은 법명 '성숙'은 평생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의암 손병희와 만해 한용운을 만나게 된다.  

3974b34c2c27319a334902342ef70081_1564746793_25.jpg


▲ 봉선사 전경. 김성숙은 1916년 불교에 입문하여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았다. 봉선사 전경. 김성숙은 1916년 불교에 입문하여 봉선사에서 홍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았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이 20대에 승려 생활을 하고 최초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는 어떤 사찰인가.

봉선사는 서기 969년 고려 광종 20년 법인국사가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1469년 조선 예종 1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시고 '광릉'이라 하고 이어 당사를 초창하여 선왕의 능침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고 '봉선사'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복구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었으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봉선사는 독립운동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봉선사와 인연이 있는 독립운동가로는 월초 화상(홍월초), 운허 스님(이학수, 춘원 이광수와 6촌),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 최학송(문학가) 등을 들 수 있다. 김성숙과 함께 1919년 3ㆍ1운동 당시 양주군 만세시위의 주역이었던 봉선사 승려 이순재ㆍ강완수도 연구 되어야 할 것이다. (주석 5)


봉선사에는 홍월초 스님이 주지로 봉직하고 있었다. 불교연구회 회장,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 교장과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민족교육에 열정이 많았던 그는 김성숙을 무척 아꼈다. 그가 불교경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크게 배려했다.

철산에 있는 가족이 봉선사 인근 마을로 이주하도록 해주었다. 생계가 어려웠던 그의 가족이 봉선사의 말사격인 수국사 소유의 땅을 경작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김성숙의 가족은 경기도 양주에서 살게 되었다.


주석
3> 김성동,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봉선사 태허스님 김성숙」, 『현대사 아리랑』, 276쪽, 녹색평론사, 2010.
4> 임혜봉, 앞의 책, 46~47쪽.
5> 이동언, 「김성숙의 생애와 독립운동」, 『운암 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136쪽, 선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