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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립군이 되겠다고 집 나섰다가 스님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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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1 18:34 조회10,8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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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2회] 한말 격변기, 평북 철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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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군 전경. 김성숙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태어났다. 철산군 전경. 김성숙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태어났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은 1898년 4월 29일 (음력 3월 10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아버지 김문환과 어머니 임천 조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동생 김성호와 여동생 김보구가 차례로 태어났다. 부모는 농삿꾼이고 본관은 상산(常山)이다. 고려 때에는 '삼원수(三元帥)'와 득배(得培)ㆍ득재(得齊)ㆍ선치(先致) 삼형제가 있었고, 조선조에서는 좌의정 귀영(貴榮), 대사헌 덕함, 판서 우석(禹錫)ㆍ연(演)ㆍ동필(東弼) 등이 배출되었으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렇다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 이땅의 평범한 민초의 가문이었다. 
 
그가 태어난 철산군은 오랜 분단의 세월과 함께 잊혀져가는 곳이다. 평안북도 서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선천군, 서쪽은 용천군, 북쪽은 의주군, 남쪽은 황해에 면하고, 군의 서부에 위치한 서림면은 동쪽은 망일산, 북쪽은 천두산과 백운산, 중앙에는 연대산 등의 산지가 솟아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300미터 내외의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청송령에서 발원한 판교천이 면의 동부를 남류하다가 교강천과 합류하여 전장천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되어 곡창지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ㆍ보리ㆍ옥수수ㆍ콩ㆍ조 등이고 농가부업으로 양잠ㆍ양봉 등이 있다.
 
철산군은 유사 이래 숱한 외침을 받고 격전을 치룬 지역이다. 고려시대에 거란ㆍ몽골ㆍ홍건적의 침략을 당했고,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삽시간에 적의 말발굽에 짓밟혔으나 의병장 김여기(金礪器) 장군이 운암산성에서 군민 300여 명을 이끌고 항전하고, 병자호란 때는 3,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끝까지 성을 사수하였다. 뒷날 김성숙이 아호를 운암(雲巖)이라 지은 것은 이와 같은 고향의 얼을 잇고자 한 것이다.
 
철산군의 저항정신은 근대로 이어졌다.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 사람이 오희원(吳熙源) 등 10여 명에 이르고, 1919년 3ㆍ1혁명기에는 3월 5일부터 읍내와 군내 여러 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3월 7일 읍내 시위에서는 정석당 등 7명이 일경에 피살되었다. 1920~21년 사이의 보합단사건을 비롯하여 철산숭의단사건, 평안남도 도청과 평양경찰서 투단사건 등의 주도자가 모두 이곳 출신이었다. 


 "지령(地靈)이 인걸(人傑)을 배출한다"는 말의 과학적인 근거와는 별개로 그 지역의 특성은 특수한 인물들을 배출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김성숙은 철산군 오지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했지만 어려서부터 이 고장 선대들의 저항정신을 들으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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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출처 : KBS 한국의 유산_운암 김성숙 편)  출처 : KBS 한국의 유산_운암 김성숙 편  ⓒ KBS 

그가 태어난 시기는 국운이 크게 흔들리는 한말의 격변기였다. 

태어나기 1년 전인 1897년 고종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청국과의 전통적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된 것을 선포했다. 김성숙은 대한제국의 인민으로 출생한 것이다.
 
임금이 황제가 되고 국호를 바꿨다고 해서 나라의 운세가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국제열강의 이권침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이에 맞서 국내적으로는 신진개화파와 수구세력이 대치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사상초유의 시민단체격인 진보적인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통해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고, 정부 측에서는 황국협회라는 수구단체를 급조하여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독립협회를 탄압했다.
 
각지에서 영학당ㆍ활빈당 등의 이름으로 농민들이 봉기하고, 제주에서는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다. 김성숙이 여섯 살 되는 1904년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었다. 일본군의 한국내 전략 요충지 수용과 군사상의 편의 제공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광대한 군용지를 수용했으며, 각종 철도 부설권도 군용이라는 명목으로 가로채 갔다.
 
김성숙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이에 한일의정서가 맺어지고, 이후 일본과 숙명적인 싸움을 하게 되는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향 마을에서 건강하게 성장한다. 그의 초명은 규광(奎光), 법명은 태허(太虛), 이명은 충창(忠昌)ㆍ창숙(昌淑)ㆍ성숙(星淑)ㆍ성암(星巖) 등이다.
 
1905년 지방 유지들이 향리에 대한독립학교라는 신식학교를 세웠다. 김성숙은 10살 때인 1908년 이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이후 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학교를 그만두고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이때 배운 한문이 불교경전을 공부하고 뒷날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크게 쓰임이 되었다. 그는 신식학교에서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이 싹트고 불교ㆍ천도교ㆍ기독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무렵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삼촌이 은밀히 국내로 들어왔다. 삼촌은 대한제국의 군관으로 정위(正尉)를 지내다 1907년 7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성숙은 삼촌에게서 독립군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는 어릴적부터 정의감이 남달랐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항몽전쟁 등 고향에서 일어난 선대들의 영웅담을 들었을 것이다. 삼촌의 만주 독립군 소식을 귀담아 듣고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김성숙은 대단히 조숙한 편이었다.

1916년 봄, 18살의 나이에 만주에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관을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1년 이회영과 이상용 등이 만주 유하현에 신흥학교를 세우고 얼마 뒤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독립군 양성기관이 되었다.
 
김성숙은 여기에 들어가서 신식군사훈련을 받고 삼촌처럼 독립군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뒷날 환국 후 김성숙은 이 때를 회고한다.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서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해 쓴다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석 1)
 
김성숙은 1916년 봄 어느날, 아버지가 땅을 판 돈을 들고 집을 나왔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가출에 아버지도 이해하실 것으로 믿었다. 열차를 타고 만주 봉천으로 가던 중 원산에서 사달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경비가 삼엄하여 월경이 쉽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중 엉뚱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마침 땅을 판 돈을 훔쳐 품 안에 넣고 집을 떠나 함경도 원산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어떤 힘센 어른에게 붙잡혀 행선지를 추궁받은 끝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사람은 부모에게 연락해서 답이 있을 때까지 여관 주인이 돈을 맡아 두게 하고는 김성숙을 거기에 붙들어 놓았다.

김성숙은 할 수 없이 여관에 머물고 있는 참이었는데, 마침 '부처님 오신날'이 되었다. 그러자 여관 손님들 가운데도 절에 가는 사람이 많고, 김성숙도 주인의 권유에 따라 절에 가게 되었다.
 
그는 주인에게 돈을 달래서 품 안에 간직하고 서강사라는 절을 찾았다. 절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도망 갈 기회를 엿보다가 새벽에 절을 나서는데 마침 산등성이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김성숙은 스님에게 자기도 승려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은 승려가 되려면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다. 그 길로 김성숙은 그 스님을 따라 양평 용문사(龍門寺)로 가서 승려가 되었다. 독립군이 되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스님이 된 것이다. (주석 2)


주석

1> 면담 이정식, 김학준 편집해설, 수정증보 김용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2005. (이후 『면담 이정식』 표기)

2> 임혜봉, 「김성숙, 승려출신의 투철한 항일투사」, 김삼웅 외, 『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 46쪽, 삼인,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