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을 시작하며] 의열단→임정 국무위원→신민당 지도위원까지의 생애
▲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환국 후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이어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들어가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한강 다리가 파괴되면서 피난기회를 잃고 나중에 피난갔다가 이승만 정권에서 부역자로 몰려 투옥되고, 혁신세력 통합운동을 벌이던 중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47살에 해방을 맞아 남한에서 24년을 사는 동안 집 한칸 없이 동가숙 서가식하다가, 지인들이 푼돈을 모아 성동구에 "비나 피하라"는 의미의 방한칸 피우정(避雨亭)을 마련해 주었으나 1년도 못 살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69년 71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파란만장→파란곡절→파란중첩→간난신고→풍찬노숙… 선생의 생애, 더 이상 무슨 용어가 필요할까. 일제강점기는 왜적의 치하니까 망국노의 고초가 숙명이라고 치더라도, 해방 뒤 선생이 겪은 옥고와 빈한과 병고, 시련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변변한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는 이승만 정권의 탄압, 여기에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의 투옥과 학대는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변고였다. 일제강점기, 가장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ㆍ박정희 정권에서 암살ㆍ테러ㆍ투옥을 당하게 된 것은 민족정기나 사회정의를 내세우기 이전에 반이성, 몰상식의 극치였다.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카스텔리오, 『의심의 기술』.
운암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공산주의 이념을 조국해방의 이데올로기로 인식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함께 아시아와 유럽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코뮤니즘은 조선청년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반제국주의ㆍ반식민지ㆍ반자본의 기치와 계급투쟁ㆍ평등사상은 운암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엘리트 청년들에게 구원의 메시아처럼 다가왔다.
실제로 러시아혁명 초기에는 이같은 마르크스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레닌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가)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정통마르크시즘은 파시즘으로 돌변했다.
전두환 폭압통치 기간에 번역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외국인이 쓴 한국독립운동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여기에 주인공이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김성숙 선생이다.
선생이 중국에서 사용한 이명이 김충창(金忠昌)이었다.
정부는 뒤늦은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파란만장→파란곡절→파란중첩→간난신고의 삶을 산 선생의 궤적을 찾아 떠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