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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선생은 해방 전에도 후에도 억울하고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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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7-31 15:19 조회7,8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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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을 시작하며] 의열단→임정 국무위원→신민당 지도위원까지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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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 선생(1898~1969).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생소한 인물이다. 선생은 왜적 치하에서 억울하고 해방 뒤에도 억울했다. 살아서도 억울하고 죽은 뒤에도 억울한 분들이 우리나라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지만, 운암 선생의 경우 특히 심한 편이다. 
  
나라 망한 무렵에 태어나 식민지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억울하여 용문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고, 나라 되찾는 3ㆍ1혁명에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 등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제와 싸우면서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25살에 망명하여 해방 때까지 22년 동안 의열단→광동꼬뮨→중국대학 교수→문필활동→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일제와 싸웠다. 인생의 황금기 청춘을 오롯이 항일투쟁에 바쳤다. 오로지 조국해방이라는 신념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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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요인 2진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진이 환국할 당시의 사진 (두 번째 줄 네 번째 인물이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운암 선생은 해방 뒤에도 억울한 삶을 살아야 했다.
          

환국 후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이어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들어가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한강 다리가 파괴되면서 피난기회를 잃고 나중에 피난갔다가 이승만 정권에서 부역자로 몰려 투옥되고, 혁신세력 통합운동을 벌이던 중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4ㆍ19 혁명 후 사회대중당으로 총선에 나섰으나 낙선하고, 일본군 장교 출신들에 의해 5ㆍ16 쿠데타가 일어나자 혁신계 인물로 낙인 찍혀 다시 투옥되었다. 해방 뒤에도 억울하고 분통한 일을 겪고 또 겪은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에 분개하여 이에 맞서고자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고, 보수야당의 선명성을 위해 윤보선이 주도한 신한당에 참여했다가 신한당과 민중당의 통합으로 태어난 신민당의 지도위원에 선출되었다. 의열단 간부→임시정부 국무위원이 통합야당인 신민당 지도위원을 역임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중에 해방 후 여야 정당에 참여한 분들이 없지 않지만, 임시정부 국무위원 출신으로 정통야당의 지도위원을 지낸 사람은 선생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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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무한에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 최초로 조직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 임정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서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는 화북지역 태항산으로 이동하고 조선의용대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다. 제1열에서 항일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북한 초대 보건상 허정숙 (오른쪽 2번째 여성), 의열단장 김원봉(4번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리집중(5번째), 석정 윤세주(6번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성숙(7번째), 북한 초대 재정상 최창익(8번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이자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 박효삼(11번째)의 얼굴이 보인다. ⓒ 독립기념관


망명지에서 중국 엘리트 여성 두군혜(杜君慧)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으나 해방과 함께 생이별하고, 한ㆍ중이 적대관계가 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선생은 47살에 해방을 맞아 남한에서 24년을 사는 동안 집 한칸 없이 동가숙 서가식하다가, 지인들이 푼돈을 모아 성동구에 "비나 피하라"는 의미의 방한칸 피우정(避雨亭)을 마련해 주었으나 1년도 못 살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69년 71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파란만장→파란곡절→파란중첩→간난신고→풍찬노숙… 선생의 생애, 더 이상 무슨 용어가 필요할까. 일제강점기는 왜적의 치하니까 망국노의 고초가 숙명이라고 치더라도, 해방 뒤 선생이 겪은 옥고와 빈한과 병고, 시련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변변한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는 이승만 정권의 탄압, 여기에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의 투옥과 학대는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변고였다. 일제강점기, 가장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ㆍ박정희 정권에서 암살ㆍ테러ㆍ투옥을 당하게 된 것은 민족정기나 사회정의를 내세우기 이전에 반이성, 몰상식의 극치였다.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카스텔리오, 『의심의 기술』.

 

 

운암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공산주의 이념을 조국해방의 이데올로기로 인식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함께 아시아와 유럽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코뮤니즘은 조선청년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반제국주의ㆍ반식민지ㆍ반자본의 기치와 계급투쟁ㆍ평등사상은 운암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엘리트 청년들에게 구원의 메시아처럼 다가왔다.

 

실제로 러시아혁명 초기에는 이같은 마르크스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레닌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가)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정통마르크시즘은 파시즘으로 돌변했다.
 
전두환 폭압통치 기간에 번역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외국인이 쓴 한국독립운동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여기에 주인공이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김성숙 선생이다.

 

선생이 중국에서 사용한 이명이 김충창(金忠昌)이었다.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든 사람은 김충창이었다. 그는 조선청년들 생활이 가장 어려웠던 1922년에서 1925년까지 내 이론 공부를 이끌어주었다." 
  
운암 선생은 공산주의이념을 공부하고도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의열단의 후신 조선의용대가 분파되고, 공산주의자 최창익이 이끈 의용대(군)가 연안으로 갈 때, 그는 김원봉과 함께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환국 뒤에도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보다 여운형과 함께하고 민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6ㆍ25전란 전후에 월북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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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 묘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위치한 운암 김성숙 선생의 묘 ⓒ 김경준


뒤에서 차차 밝히겠지만 선생은 투철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그럼에도 '해방된 조국'에서 그의 혁신운동을 박정희 정권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노후에는 야당 일각에서 비를 피하며 지내다가 분단조국의 참상을 지켜보면서 눈을 감았다.
          

정부는 뒤늦은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파란만장→파란곡절→파란중첩→간난신고의 삶을 산 선생의 궤적을 찾아 떠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