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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항일단체들의 본부를 중산대학에 설치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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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12 17:38 조회6,4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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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13회] 중국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라 광주지역 한인사회도 변화의 물결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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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숙 중산대학 졸업사진. 김성숙은 북경민국대학에서 수학하다가 1926년 7월 중산대학 법학과로 전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김성숙 중산대학 졸업사진. 김성숙은 북경민국대학에서 수학하다가 1926년 7월 중산대학 법학과로 전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광주에서 김성숙의 할 일은 많았다.

무엇보다 의열단의 선전부장을 맡아 대외홍보의 역할을 하면서 각지에 있는 한국청년들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하여 국내외 각지에서 광주에 모인 청년 300여 명을 규합하여 1926년 '유학(留學)한국혁명청년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운동』을 간행하였다.

그는 주필로서 기관지 발행을 주도하고, 내용은 일제의 제국주의 정책을 반대, 피압박 민족해방을 제창하는 논설이 중심이 되었다. 그가 재학중인 중산대학에 근거지를 두었다.
 
그는 기관지 논설뿐만 아니라 이 지역 항일단체들이 발표한 각종 문건을 기초할만큼 이론가이자 문장가로서 한인사회에서 명성을 얻었다. 항일단체들의 본부를 중산대학에 둔 데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청년회나 동지회의 거점을 황포군관학교가 아닌 중산대학에 두었던 것은, 황포군관학교가 군사전문가 및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로서 교규(校規)가 엄격해 학생들의 외출자유가 제한되었던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국 군관학교 내에 한인의 반일단체가 공개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석 6)

날로 격심해지는 중국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라 광주지역 한인사회도 변화의 물결이 심해졌다. 김성숙이 중산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1924년 1월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합의에 따라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손문의 삼민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하고 농민ㆍ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공산당과 손을 잡는다는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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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숙의 국립제일중산대학 학적표. 김성숙의 국립제일중산대학 학적표.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이에 따라 광주는 반제ㆍ반군벌의 혁명거점 도시가 되고, 혁명군에서는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북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25년 3월 모든 반군벌 세력을 끌어들여 중국혁명의 과제를 이끌었던 손문이 죽자 국민당 내의 반공주의 세력이 공산당 배척운동을 전개하면서 1927년에 제1차 국공합작은 파산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정세의 격동 속에서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 예컨대 의열단, 중국공산당지부, 상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등 파벌이 난립하면서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김성숙은 그 같은 파벌을 타파하기 위해 장지락 등과 함께 우선 만주, 시베리아, 상해, 북경, 국내 등 각지에서 온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KK'를 조직하였다.

'KK'는 독일어 '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로 '조선인 공산주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KK'는 광주 한인세력 통합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만큼 결속력이 강했으며, 김성숙은 공산주의자를 이 단체로 결집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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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이 다니시던 중국 중산대학. 운암 김성숙 선생이 다니시던 중국 중산대학.  ⓒ 민성진 


이런 'KK' 조직은 김성숙이 북경 시절부터 '통일 공산당'의 결성을 위해 조직한 '창일당'과 비슷한 성격의 단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즉, 'KK'는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의 광주지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6월 여운형이 광주에서 화요계 일색의 조선공산당 광동지부를 설립하고자 할 때, 김원봉은 그것을 '분파주의'라 지목하면서 격론을 벌였다. 이러한 김원봉의 노선은 김성숙과 'KK'와도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주석 7)

김성숙의 이념체계는 대단히 유연한 편이었다.

의열단의 민족주의 조직과 공산당의 비밀조직인 'KK'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조국해방과 일제타도의 목표를 추구하였다. 그는 1927년 1월 1일자로 발행한 기관지 『혁명운동』 제2호에서 야광(夜光)이란 필명으로 「1927년을 맞이하여」라는 글에서 의지의 일단이 보인다.
 
1927년에 접어들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떠한 책략을 주로 하고 어떠한 전술을 사용해야 할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의론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올해 안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업을 실현하고자 한다.
 
(1) 사회운동가를 완전히 통일시키고 공산당의 영도 아래 기율적ㆍ조직적으로 운동을 개시할 것.
 
(2) 민족적 대혁명당을 조직함으로써 일반 혁명민중을 이 당내에 결집시키고 당의 지도로부터 의식적이고 기율적인 운동을 개시할 것.
 
(3) 국내에 있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것. (주석 8)


주석

6> 손영홍, 앞의 책, 51쪽.
7> 앞의 책, 52쪽.
8>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재(在)광동 불령선인의 통신과 관련사건」, 1927년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