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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미츠야협정'으로 베이징 떠나 광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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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10 18:55 조회8,7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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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11회] 일본뿐 아니라 중국 관헌의 배척ㆍ탄압까지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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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유일한 승려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운암 김성숙 선생 우리나라 유일한 승려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운암 김성숙 선생  ⓒ 민성진 


당시 베이징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실망한 아나키즘 계열의 이회영과 신채호ㆍ박용만을 비롯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머물고 있었다.

1923년 5월 국민대표회가 결렬되면서 각 정파의 인물들이 이곳에 포진하고, 3ㆍ1혁명 후 크게 증가한 유학생과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베이징은 상하이와 함께 한국독립운동의 텃밭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 된서리를 맞았다.

일제와 괴뢰군벌 장작림의 주선으로 1925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三矢宮松)와 중국봉천성경무서장 위전(于珍) 사이에 체결된 '재중(在中)한인 단속에 관한 협정', 일본측 명칭은 '불령선인 취체 방법에 관한 조선총독부ㆍ봉천성간 협정'이다. 일반적으로 '삼시협정'(미츠야협정)이라 불린다. 

 

8개항으로 된 협정의 요지는 ① 중국 관헌은 재중 한인에 대해 호구를 엄격히 조사해 패(牌)로 편성하고 연대책임제로 단속한다. ② 무기를 소지한 한인의 월경을 금지하여 위반자를 체포하여 일본측 관헌에게 인도한다. ③ 항일 한인단체를 해산하고 그 무기를 몰수한다. ④ 농민 소유의 조수(새와 짐승) 구제용 총기를 제외한 한인 소유의 총기ㆍ화약을 수시로 수색하여 전부 몰수한다. ⑤ 일본 측 관헌이 지명하는 항일단체의 수령을 체포하여 일본관헌에게 인도한다. ⑥ 단속 상황을 상호 통보한다. ⑦ 중ㆍ일양국 경찰은 서로 월경치 않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상호 통보한다는 내용이다. 

 

'미츠야협정'의 체결 결과 재중 항일독립운동 세력의 국내 진입 건수는 1924년 560건에서 25년 270건, 26년 69건, 30년 3건으로 크게 격감하였다. 


이로 인해 한인의 민족운동은 일본뿐 아니라 중국 관헌의 배척ㆍ탄압까지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일제에 대한 저항심리라는 동질성으로 비교적 관대했던 중국관헌 측은 한국독립운동가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1932년 4월 한인애국단 윤봉길 의거로 사정이 바뀌었다.)

당장 김성숙을 비롯하여 베이징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설 땅이 어렵게 되었다. 중국경찰은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요시찰' 독립운동가들에게 신원증명을 위한 사진을 제출토록 요구했다.

김성숙은 1925년 9월 말 사진 제출을 하지 않아서 베이징 경찰청에 소환되었다. 다음은 진술내용이다.

나는 한국인이고 26세이다. 북경에 와서 남구연 60호 대연공우(南溝沿 六十號 大連公寓)에 거주하고 지금 민국대학에서 수업하고 있다. 이석화ㆍ계완순은 나와 동향이다. 관할 구서(區署)의 순경이 누차 나에게 사진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나는 일본공사관이 중국경찰에 공문서를 보내어 대신 한국인에게 사진을 요구하여 전해달라고 한 것을 염려하여 누차 버티고 제출하지 않았다. 이제 일본영사관이 시킨 것이 아니라 중국경찰서가 향후 참고를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3~4일 내에 제출하겠다.… (주석 1)

김성숙이 사진을 제출하지 않은 것은 이 사진이 일본경찰로 건너 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권국가 경찰의 요구를 언제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베이징에서는 공개적인 반일운동을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서게 되고, 그래서 이 도시를 떠나기로 작심했다.

새로운 목적지는 중국국민혁명의 본거지가 되고 있는 먼 남쪽의 광주(廣州)였다. 그동안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있던 의열단도 광주로 옮기기로 했다. 김성숙과 논의가 된 결정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는 의열단과 함께 제2의 활동무대를 광주로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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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이 다니시던 중국 중산대학. 운암 김성숙 선생이 다니시던 중국 중산대학. ⓒ 민성진






함께 활동하던 장건상을 비롯하여 고려유학생회 계열은 아직 베이징에 잔류한 채, 일차적으로 그만 광주로 떠났다. 중국국민당의 주선으로 중산대학(中山大學)에 편입하기로 한 것이다. 1925년 겨울의 일이다.

1925년 겨울, 김충창은 혁명활동을 하기 위해 광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나도 그와 동행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서로 다른 길을 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주석 2) 

이 시기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어 책임비서에 김재봉이 선임되고(1925. 4), 총독부가 치안유지법을 공포했으며(5월 7일), 중남부 지방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냈다. (7월) 만주에서는 정의부 등 동북지역 독립운동 단체가 통의부로 통합하고(1월),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한 데(3월 23일) 이어, 임시정부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다.(3월 30일)

이와 같은 시기에 김성숙은 베이징을 떠나 다시 낯선 망명지로 발길을 옮긴다.


주석
1> 손염홍, 앞의 책, 47쪽.
2> 님 웨일즈, 『아리랑』, 1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