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10회] 베이징지역 한인민족운동 진영의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해
▲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베이징 유학시절 김성숙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의 하나는 '창일당(創一黨)'의 조직이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지부 형태로 조직된 창일당은 장건상ㆍ김성숙ㆍ장지락ㆍ양명ㆍ김용찬ㆍ김봉환ㆍ이낙구 등이 베이징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 창립하였다.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혁명사를 창립하고, 앞에서 소개한 기관지 『혁명』을 간행하였다. 창일당의 지도자는 장건상이었지만 구성원 가운데 유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김성숙은 유학생들과 공산당 조직을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24년, 북경의 한인사회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와의 노선 차이도 보다 분명해지고 있었다. 김성숙 역시 무정부주의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 공산주의 노선에 매진해갔다.
그같은 선상에서 김성숙은 장건상, 장지락, 양명, 김용찬, 김봉환, 이낙구 등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 창일당을 조직하였다. 이 창일당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북경지부였다. (주석 10)
1920년대 국내외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해결이 쉽지 않는 하나의 난제가 대두되었다. 공산주의를 통해 곧바로 조국해방을 쟁취해야 한다는 주장과 한국은 인구의 70~80%가 농업종사자이기 때문에 계급문제보다 조국해방이 먼저라는 입장이었다. 레닌은 후자의 주장이었다.
김성숙은 기관지 『혁명』의 논설을 통해 현단계에서 계급혁명보다는 민족혁명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신을 역설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도로 볼셰비키적 폭력운동만이 아니라 아나키즘적 폭력운동도 필요하다는 논지를 폈다. 아나키즘적 폭력운동은 아나키즘을 혁명적 공산주의로 변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나키즘을 연합의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김성숙과 '창일당'의 멤버들은 코민테른 극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와 중국공산당 창립자이며 이론가인 이대교(李大釗)를 만나 이론공부를 하고 연대를 모색하였다.
김성숙은 『혁명』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면서, 코민테른 극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 및 중국공산당의 창립자 이대교 등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보이틴스키는 『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성숙은 보이틴스키와 이대교를 만날 때, 조선공산당 각파의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것은 당시 중국 내 국공합작의 열기가 무르익던 상황과도 부합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창일당의 창립취지와도 뜻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화요파가 중심이 되었던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반대했다. (주석 11)
▲ 김성숙이 1923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수학한 민국대학 김성숙이 1923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수학한 민국대학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은 해방 뒤 이정식 교수와 면담에서 "1925년 보이틴스키가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승인을 얻기위해 베이징에 온 조봉암과 조동호를 자신에게 소개시킨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때 이들과 토론을 벌이는 한편, 화요파(화요회가 공식명칭, 1924년 11월 서울에서 홍명희ㆍ홍증식 등이 조직한 사회주의 단체 - 필자)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반대했다고 털어놨다.
김성숙은 베이징의 민국대학 3년여 동안 학문과 독립운동을 일체화하는 분망한 나날을 보내었다. 1925년 원세훈 등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와 공동으로 북경대학 제2원에서 3ㆍ1운동 6주년 기념회를 개최했다.
김성숙은 3ㆍ1혁명기념회에 고려유학생회 대표로 참가하여 이념으로 분리된 베이징지역 한인민족운동 진영의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아울러 원세훈ㆍ신숙 등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과 통합을 위한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다.
이 무렵(1925년 6월) 중국동북지역과 베이징 일대를 통치하던 장작림(張作霖) 군벌과 일제 사이에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면서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지목을 받아오던 김성숙은 광주(廣州)로 피신하기로 한다. (주석 12)
주석
10> 앞의 책, 44쪽.
11> 앞의 책, 45쪽.
12> 『연보』,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