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9회] 김성숙은 이론가이면서도 조직에 유능했다
[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반역사의 표면단체라고 할 수 있는 북경조선고학생회는 1923년 11월 밀양 출신 정선호(鄭善浩)와 간도에서 건너온 함경도 출신 이범수(李範守) 등이 주도한 조직이었다. 이들은 북경대학 근처의 륭복사가(隆福寺街) 대동공우(大東公禹)에 사무실을 두었다. 반역사에 참여한 인물들은 대부분 고학생들로 식민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또한 제국주의의 모순을 인식하면서 그에 대한 '반역'을 위해 조직한 것이 비밀결사 '반역사'였다. (주석 8)
김성숙의 꿈은 원대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조선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만민이 평등한 이상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이었다. 불교의 불토정국(佛土淨國)과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사상이 복합된, 자유평등의 신사회건설론이다. 그가 주도한 북경불교유학생회나 반역사 등의 조직이 모두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베이징의 한인 사회는 다양한 사회사상만큼 여러 유형의 집단으로 갈라졌다. 여기에는 국내의 출신성분도 작용하였다. 유학생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분파현상이 나타나고, 이에 실망한 김성숙은 북경조선유학회를 떠나 별도의 '학생구락부'를 조직하였다.
1923년 말~1924년 초에 들어 북경 한인사회에서는 사상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증폭되어 갔다. 민족주의 '구파(舊派)'와 사회주의 '신파(新派)가 그것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북경조선유학생회의 잡지 『신인물(新人物)』에 소완규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경고하는 글을 올리자, 조선유학생회는 그를 제명하고 구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성숙은 윤종묵, 김봉환, 심용구 등 불교유학생회에 속한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들과 함께 1924년 2월 별도의 '학생구락부'를 조직하고 북경조선유학생회에서 이탈했다. 학생구락부는 회원이 백여 명에 이르면서, 조선유학생회를 능가하는 위세를 떨쳤다.
김성숙을 비롯한 불교유학생회가 학생구락부의 핵심을 이루는 가운데, 김성숙은 동회의 회장을 맡으며,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부상해 갔다. 그리고 북경지역 한인 유학생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주석 9)
김성숙은 이론가이면서도 조직에 유능했다.
1923년 봄, 베이징 YMCA회관에서 열린 한인학생들의 시국관련 토론회에서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여, 베이징 한인사회에 명성을 날렸다.
김성숙은 1925년 1월 '학생구락부'를 '고려유학생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확대 개편하였다. 여기에는 고려유학생회원 뿐만 아니라 기독교청년회 출신들까지 포용하여 참여시켰다.
고려유학생회는 3월에 간행한 기관지 『해외순보』에서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조선민족 고유한 문명을 발휘시키며 동서의 최고 학설을 소개하여 민중의 신문화를 건설하여 정치상 경계상 평등한 새 사회를 세우자"를 주지(主旨)로 내세웠다. 회장인 김성숙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주석
8> 『연보』, 341쪽.
9> 손염홍, 앞의 책, 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