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무한으로 이동, 광동꼬뮨에 적극 참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13 18:35 조회8,131회

본문

[운암 김성숙 평전 14회] 김성숙은 망명 이후 여러 조직에 참여하고 활동했지만, 그의 정신적 뿌리는 의열단이었다  


cec7367a5feb1cd738180a97adcea510_1565688829_48.jpg



▲ 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은 망명 이후 베이징과 광주에서 여러 조직에 참여하고 활동했지만, 그의 정신적 뿌리는 의열단이었다.


의열단은 1919년 창립한 이래 박재혁의 부산경찰서장 투탄사건,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투탄사건, 김익상ㆍ오성륜ㆍ이종암의 다나카 저격사건, 김상옥의 일경과 총격사건, 김지섭의 도쿄 이중교 투탄사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항일투쟁을 벌였다.  

이제는 투쟁 방식을 바꾸자는 것이 김성숙의 생각이었다. 의열투쟁보다 대중 혁명조직을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제2차 의열단 전국대표대회가 1927년 3, 4월 광주에서 열렸다.

김성숙은 광주 본부의 집행위원 5인으로 뽑혔다. 김원봉ㆍ최원ㆍ장지락ㆍ이영준과 함께였다. 김원봉을 제외한 4인은 모두 중산대학 출신이었다.
 
이 시기와 관련 및 님 웨일즈는 『아리랑』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25년 겨울에서 1927년 말까지 김충창과 나는 광동(광주)에서 언론활동에 있어서나 청년연맹이나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에 있어서 긴밀히 연락하며 함께 일하였다. 거기에다 유명한 테러리스트인 오성륜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1926년 겨울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우리와 합류하였다. 그래서 우리 셋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오성륜은 내가 묵고 있던 조그마한 여인숙에서 나와 동거하게 되었다. 김충창은 우리의 정치이론가였고, 오성륜은 행동의 사나이였으며, 나는 모든 면에서 그들의 어린 제자였다.
 
당시 나는 겨우 스물 두 살이었는데, 반면에 오성륜은 대략 서른일곱 살 쯤 되었고 김충창은 서른 두 살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공개적인 지도자'였으며, 반면에 그들은 배후의 세력자였다. (주석 9) 


김성숙의 특장은 추진력이다. 의열단 노선수정과 KK 활동 등에만 머물지 않았다.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하는 '대독립당촉성회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1927년 봄에 상하이로 건너가 장건상을 만나 대독립당촉성회운동을 논의하였다.
 
해방 뒤 고국에 돌아와서 혁신운동을 함께할 때까지 평생의 동지관계이던 장건상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미국 밸프레이조대학을 졸업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 외무위원을 지내고, 베이징에서 잡지『혁명』을 출판할 때부터 김성숙과 뜻을 같이 해왔다.
 
김성숙과 장건상 등은 1927년 5월 8일 의열단을 비롯 이념의 차이를 넘어 몇 개 항일운동 단체와 함께 '광동대독립당촉성회'를 결성했다. 170여 명이 참여하여 1920년대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사회주의ㆍ민족주의세력의 통합단체였다.
 
이런 와중에 중국 대륙의 정세는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국민당정부는 1926년 7월 장개석을 사령관으로 하여 대대적인 북벌에 나섰다. 장개석은 1927년 4월 반공쿠데타를 일으켜 당내의 공산주의자를 숙청하면서 장작림 등 군벌을 타도하고자 북벌전쟁을 일으켰다.
 
광주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인학생들은 대부분 북벌에 참가했으나 중산대학의 한인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북벌군은 반년 사이에 남방의 각 성을 점령하고 국민정부의 수도를 광주에서 무한으로 천도하였다. 김원봉과 유자명 등 의열단의 주축도 무한으로 가고, 김성숙도 활동근거지를 무한으로 옮겼다.

무한에 도착한 김성숙은 교도단 제2영 제5련의 중국공산당조직 책임자를 맡았다. 김성숙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중국공산당조직 책임자를 맡았던 것을 보면, 그 이전에 가입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무렵 그와 동고동락하던 장지락이 1925년 가을 광주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선혁명조직과 중국공산당조직의 허가를 받아 6명의 한인 혁명가와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김성숙도 이때 가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혹시 그가 중국이름 '김규광(金奎光)'을 사용하는 시점과 중국공산당 가입이 같은 무렵이 아니었을까. (주석 10)


김성숙은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에서 보수적인 국민당정부보다 진보성향인 중국공산당의 노선에 마음의 비중이 쏠리게 되고, 많은 한국청년들의 성향도 비슷하였다. 이 무렵 광동에서 인민항쟁 광동꼬뮨이 일어났다. 그도 앞장에 섰다. 님 웨일즈의 기록이다.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 전쟁 중 한국인 의용병들은 그 용감성과 뛰어난 통솔력으로 유명하였다.(…) 불과 6개월 이내에 양자강 유역까지 도달한 북벌군의 승승장구하는 급진격이  한창이었을 때 모든 혁명가들이 느꼈던 환희와 열광은 지금은 기억해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화북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 우리의 가슴은 미칠 듯이 기뻐 날뛰었던 것이다!

〈전 아시아의 자유를 위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무기를 잡고 일어서려고 2천만 한국인이 국내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는 자신 있게 중국인들에게 말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우익의 장개석이 지도하는 반혁명이 일어나 성공이 빤히 바라보이는 바로 승리의 문턱에서 국ㅡ공 분열이 일어났던 것이다.
 
중국이 공식적으로 분열하고 혁명이 좌절되었으며, 한국, 러시아, 일본, 기타 각국과의 혁명적 유대감이 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혁명과 개인들도 모두 이 충격으로 각각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나라 혁명의 지평선 위에 검은 구름이 뒤덮이는 것을 보았으며 이 검은 구름이 흩어지는 순간을 내다 볼 수가 없었다.
 
장개석이 좌익 무한 정부에 대항하여 반동적인 남경 정권을 세우자 모든 한국인들은 즉시 우파 세력을 떠나서 좌익을 지원하기 위하여 무한으로 달려갔다. 무한 정부가 쓰러진 다음에는 남아 있던 우리 한국인 집단들도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우리들 1백 명은 장차 혁명 정권의 탈환을 도와주기 위하여 광동에 머물러 있었다. 국민당의 반동이 일어난 그후 소수의 우익 인사들은 희망을 잃고 한국이나 만주로 돌아가 버렸다. 1927년 말까지 2백 명이 재차 광동에 모여 꼬뮨 투쟁에 가담하여 싸웠다. (주석 11)

주석
9> 님 웨일즈, 『아리랑』, 127~128쪽.
10> 손염홍, 앞의 책, 56~57쪽.
11> 님 웨일즈, 앞의 책, 131~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