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전신) 출신 22명, 조선일보 출신 12명, 동아일보 출신 8명 …중복 집계 포함 친일반민족행위자 언론인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나치 부역 언론인 대대적 청산
광복절이 다가오면서 친일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친일파의 공식 명칭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관련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총 20개)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1.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2.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3.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4.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그 단체의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활동을 주도한 행위
5.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
6.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7.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다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등으로 제3조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사람은 예외로 한다.
8.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9.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
10.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1.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宣傳)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12.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5. 판사·검사 또는 사법관리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6.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8.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
19.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
20.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에 의한 민족문화의 파괴·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반출에 적극 협력한 행위
우리 정부는 2006년 106명, 2007년 195명, 2009년 705명 등 총 1천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언론인이 33명이다. 신조어였던 '기레기'(기자+쓰레기)가 이젠 사전에 실릴만큼 널리 퍼진 현재 되돌아보면, 그들을 '원조 기레기'로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친일 기레기'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출신이 다수
리스트를 살펴보기 전 참고할 내용이 좀 있다.
우선 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전신), 조선일보, 동아일보 출신이 다수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 언론은 지금처럼 많지 않았는데, 그 중 조선총독부 기관지 격의 매일신보, 1920년 같은 해에 창간한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가 제법 큰 규모였다. 이와 함께 몇 개의 신문 및 여러 잡지들, 라디오 방송을 한 경성방송국 등이 있었다. 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가 전신인데, 이때는 반일 성향이었지만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즉 한일강제병합 직후 조선총독부 운영 경성일보에서 인수, 이름도 매일신보로 바뀌어 사실상 조선총독부 관제 신문으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어 1945년 광복 직후 서울신문으로 또 다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재직했다고 해서 친일파 언론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재직 중 쓴 기사 및 기고, 강연을 비롯한 친일단체 활동, 그리고 신문 제작 및 발행의 책임 소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위 따위를 따져야 한다.
또한 일제의 2차 세계대전 패망(우리의 광복) 전까지 줄곧 조선총독부의 '나팔수' 역할을 한 매일신보에 비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민족지의 면모를 보이다가 후반에 친일 성향이 짙어진 점을 감안해야 한다. 1930년대 전후부터 일본이 여러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서 징병 및 징용 선동, 전쟁 찬양 등의 내용을 노골적으로 담은 글 게재를 점차 늘린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 계기로 친일파 언론인 득세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이 친일 언론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주요 전환점이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중일전쟁 관련 여러 신문의 보도 내용을 두고 "매일신보의 보도 내용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비해 솔선적, 지도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즉, 당시 세 신문이 서로 비교 대상이 되는 대표적 친일 언론이었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이들 3곳 언론사 외에 이완용 내각 친일 정책 홍보지 '대한신문', 친일단체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친일단체 국민협회 기관지 '시사평론'(시사신문), 만주일보, 간도신문, 내선일체실천사 등도 꼽힌다.
친일파 언론인의 활동 무대로 친일 잡지도 있었다. 친일 신문사에서 자매지 격으로 만들기도 했다. 삼천리, 조광, 태양, 동양지광, 신시대, 반도지광, 신민, 내선일체, 춘추 등이다. 친일파 언론인들이 이들 잡지에 기고를 많이 했다. 1930년대 전후부터 일본의 침략 전쟁이 시작되면서, 관련 선동 및 찬양 내용이 다수였다.
친일 단체에서 활동한 언론인도 꽤 확인된다. 잘 알려진 친일 단체는 임전대책협의회, 대화동맹, 협성구락부, 국민협회, 국민총력조선연맹, 대정친목회, 동민회, 국시유세단, 구일회, 조선언론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배영동지회 등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언론인들도 있는데, 이 역시 친일파 언론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언론인 34인 리스트
이름, 생몰연도, 주요 이력(친일 이력 중심) 등
▷김동진 (金東進, 1902~?) 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 도쿄지국장, 매일신보 총무국장·발행인 겸 편집인, 임전대책협의회·대화동맹 등 친일 단체 활동
▷김상회 (金尙會, 1890~1962) 시사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사장 겸 주필, 매일신보 편집국장·논설부 주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김선흠 (金善欽, ?~?) 매일신보 기자·편집인 겸 발행인
▷김성수 (金性洙, 1891~1955) 3.1운동 참여 등 독립운동→변절→동아일보 사장, 경성방송국 시국강좌 연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 활동, 춘추 등 친일잡지·매일신보 등 기고
▷김환 (金丸, ?~?) 국민신보 기자, 매일신보 근무, 협성구락부·국민협회 등 친일 단체 활동
▷노성석 (盧聖錫, 1914~1946) 신시대 발행인, 조선임전보국단·대화동맹 등 친일 단체 활동
▷노창성 (盧昌成, 1896~1955) 국민총력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 등 친일 단체 활동
▷민원식 (閔元植, 1886~1921) 시사신문 사장, 친일 단체 국민협회 조직
▷박남규 (朴南圭, 1905~) 내선일체실천사 사장, 내선일체 편집인 겸 발행인
▷박희도 (朴熙道, 1889~1952)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변절→친일 잡지동양지광 창간
▷방응모 (方應謨, 1883~1950) 조선일보 사장, 친일잡지 조광 창간
▷방태영 (方台榮, 1885~ ?)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편집국장, 대정친목회·동민회 등 친일 단체 활동, 삼천리·신시대·조광 등 친일 잡지 기고
▷변일 (卞一, ?~?) 자주독립사상 고취 제국신문 주필→변절→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
▷서춘 (徐椿, 1894~1944) 도쿄 2.8 독립선언 9인 대표 참가→9인 대표 중 소설가 이광수와 함께 변절→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 기자, 매일신보 주필, 조광 등 친일 잡지 기고, 친일 잡지 태양 창간
▷선우일 (鮮于日, 1881~1936)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 만주일보 창간 및 간도신문 경영, 조선일보 편집국장, 대정친목회 등 친일 단체 활동
▷송순기 (宋淳夔, 1892~1927) 매일신보 기자·발행인 겸 편집인·논설부장
▷신광희 (申光熙, 1877~?)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1기 졸업→변절→대한신문 사장·발행인 겸 편집인, 국시유세단 등 이완용 계열 친일 단체 활동
▷심우섭 (沈友燮, 1890~1946) 매일신보 기자·편집고문, 동민회·구일회·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 활동
▷양재하 (梁在廈, 1906~1966) 조선일보 기자, 동아일보 기자,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 활동, 춘추 등 친일 잡지 기고
▷유광렬 (柳光烈, 1898~1981) 동아일보 사회부장, 조선일보 사회부장, 매일신보 편집국장, 친일잡지 조광 필진, 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활동
▷이기세 (李基世, 1888~1945) 시사신문 근무, 국민협회 등 친일단체 활동, 매일신보 사회부장·편집인 겸 발행인
▷이상협 (李相協, 1893~1957)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장,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편집고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 활동
▷이원영 (李元榮, 1910~1985) 매일신보 도쿄 특파원·논설위원, 동양지광 등 친일 잡지 기고
▷이윤종 (李允鍾, 1896~?) 매일신보 편집국장·논설부장, 신시대·조광 등 친일 잡지 기고
▷이익상 (李益相, 1895~1935) 조선일보 학예부장, 동아일보 학예부장, 매일신보 편집국장
▷이장훈 (李章薰, ?~?)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
▷이정섭 (李晶燮, 1895~?) 조선일보 정치부장, 시중회 등 친일 단체 활동, 삼천리 등 친일 잡지 및 조선일보 기고
▷이창수 (李昌洙, 1909~?) 매일신보 통신부장·논설위원, 조광·춘추·신시대 등 친일 잡지 기고, 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활동
▷정우택 (鄭禹澤, 1889~?) 매일신보 편집인 겸 발행인, 동아일보 정리부장
▷정인익 (鄭寅翼, 1902~1955) 조선일보 기자, 매일신보 사회부장·도쿄지부장, 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활동
▷최영년 (崔永年, 1859~1935) 일진회 등 친일 단체 활동
▷함상훈 (咸尙勳, 1903~1977) 친일 잡지 조광 필진, 배영동지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활동
▷홍순기 (洪淳起, 홍양명(洪陽明), 1906~?) 조선일보 기자·논설위원, 매일신보 신징 지사장
▷홍승구 (洪承耉, 1889~1961) 조선총독부 소속 관리, 매일신보 도쿄 특파원·논설부장, 신민·반도지광·신시대 등 친일 잡지 기고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부사장 및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소설가 이광수는 2곳 언론사 시절 이후인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친일파로 변절했다. 따라서 친일파 언론인이 아닌 친일파 예술인 리스트에 등재돼 있다.
※김성수의 경우 친일파 교육인 리스트에 등재돼 있으나, 동아일보 창간 이력을 감안해 친일파 언론인 리스트에 넣어 소개한다.
◆'조중동' 현 사주와 직·간접 연관 눈길
중복 집계를 포함, 친일파 언론인은 매일신보 출신 22명, 조선일보 출신 12명, 동아일보 출신 8명 순이다.
3곳 언론사 모두 거친 친일파 언론인도 있다. 김동진, 서춘, 유광렬, 이상협, 이익상 등 5명이다.
전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방상훈 현 조선일보 사장의 할아버지라서 눈길을 끈다. 방응모의 장남이 방일영 전 조선일보 사장이고, 방일영의 장남이 바로 방상훈이다.
그런데 방응모가 조선일보 초대 사장인 것은 아니다. 초대 사장은 조진태이며, 조진태를 비롯한 친일경제단체 '대정실업친목회'가 중심이 돼 1920년 조선일보를 창간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친일파 송병준이 소유했다가도, 이상재와 안재홍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사장을 맡기도 하는 등 친일 언론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안재홍 사장이 구속되고, 사장 자리가 공석이 되는 등의 혼란기를 겪다 사장을 맡은 독립운동가 조만식으로부터 1933년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다.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도 함께 시선을 모은다. 일제강점기 초중반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를 인수해 운영한 교육자로서의 업적이 있지만,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활동이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하도록 만들었다는 평가다.
그간 독립유공자와 친일파 양쪽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 김성수에 대한 논란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에 이은 2011년 건국훈장 서훈 취소 결정 후에도 이어졌다. 그를 기리는 인촌기념사업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것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해서다. 그러나 2018년 대법원 판결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적이 확정되면서, 이 논란 역시 매듭지어졌다.
현 동아일보 및 채널A 대표이사 김재호는 김성수의 증손자이다.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이 동아일보 회장을, 김상만의 장남 김병관 역시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했고, 이어 김병관의 장남 김재호가 현재 동아일보 및 채널A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참고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조중동'이라는 수식에 함께 묶이는 중앙일보의 경우 초대 중앙일보 및 동양방송(현 JTBC 전신) 회장 홍진기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편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상 '친일반민족행위자'와는 구분된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전주지방법원 판사를 맡은 등의 이력이 있어서다. 중앙일보 창간은 광복 후인 1965년 이뤄졌다.
홍진기는 현 중앙홀딩스·중앙일보·JTBC 대표이사 홍정도의 할아버지이다. 홍진기의 장남 홍석현이 전 중앙일보 대표이사이자 현 중앙홀딩스 회장이고, 그의 장남이 바로 홍정도이다.
재계까지 범위를 넓히면,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로 인해 삼성그룹과 연결된다. 홍라희 남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홍진기의 사위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이건희와 홍라희의 자녀들이자 홍진기의 외손주들.
다만, 일제강점기에 신문사를 경영했고 친일 행적도 확인된 방응모·김성수와 비교해, 홍진기의 경우 일제강점기 판사 이력과 광복 후 중앙일보 창간 이력을 직접적으로는 연관 지을 수 없다는 반론을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중앙일보를 두고 '친일파로 평가 받은(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 창간한 신문'이라는 수식 자체가 가능하다. 약한 연결고리임에도 친일 자체와 무관한 현존 다수의 언론사들과 비교하면 분명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이다. 사실 홍진기는 일제 법관 출신 인물이면서 이승만 대통령 시절 법무부 및 내무부 장관을 지내는 등 정부 요직에 임명된 이력이 더 논란이 된 바 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1948년 친일파 처벌을 위해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등에서 법관 등 관리로 일제에 부역한 인물들에 대한 처벌 내지는 최소한 사회활동을 막는 조치라도 있었다면, 정부 요직 임명은 물론 중앙일보 창간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및 친일인명사전 등의 등재 여부와는 별개로 방응모, 김성수, 홍진기에 대해서는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과거 업적에 대한 평가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공'이 친일 행적이라는 '과'를 상쇄할 수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공, 과를 '따로' 또한 '있는 그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
그 모범 사례가 있다. 실은 조선일보·동아일보보다 더 많은 친일파 언론인을 배출한 매일신보, 즉 현재의 서울신문이다. 조선총독부가 사주인 셈이었던 매일신보는 광복 후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며 과거와도 결별했다. 간판만 바꿔 단 게 아니었다. 광복 후에도 조선일보·동아일보는 친일을 한 사주 및 그 후손이 계속 회사를 경영했지만, 매일신보는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새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인 것.
과거와 결별했다고 해서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기는 것은 아니다. 서울신문 홈페이지 연혁 소개 코너를 살펴보면 매일신보 제호 변경 당시를 두고는 '총독부 입장을 대변하고 일제의 한반도 통치 합리화를 선전하기 위한 황국신민화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서울신문 제호 변경 때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위대한 유산과 매일신보의 아픈 유산을 모두 물려받는다는 취지'라고, 과거 신문사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는 나치 부역 언론인 대대적 청산 "우리와 딴판"
친일파 언론인들은 언제, 어떻게 죽었을까?
일부는 광복 전에 죽었다. 자연사 한 경우가 있고, 요즘 기자들이 스트레스로 직업병을 겪듯이 암 등 각종 질환 때문에 일찍 사망한 경우도 있다. 또한 광복 후 곧장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을 당한 데 따라 사망 시기를 특정할 수 없어 실종 기록만 있거나, 은퇴 후 행방을 알 수 없어 역시 사망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꽤 확인된다.
그런데 광복 후 정부의 요직, 기업의 수장, 국회의원 등을 맡은 경우도 적잖다.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되며 친일 행적에 대한 처벌을 피한 인물들이다.
외국은 어땠을까? 프랑스가 나치 부역 언론인을 잘 청산한 대표적 국가로 꼽힌다.
샤를 드골 장군의 프랑스 임시정부는 1944년 언론계 숙청 훈령을 발표, 나치에 부역한 언론사에 대한 발행 금지 조치를 했다. 언론사 538개 가운데 115개가 재판을 거쳐 폐쇄됐다.
언론사만 처단한 게 아니었다. 상당수 언론인이 사형과 무기징역 등의 강도 높은 처벌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잡지 '오토' 사주이자 여러 지역신문 발행인이었던 신문재벌 알베르 르죈느가 친나치 행위로 사형에 처해졌다. '오르주디' 주필 조르주 쉬아레즈도 글은 물론 연설로 나치 찬양을 해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됐다. '라레볼리숑 나쇼날' 주간으로 있으면서 나치에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논설을 쓴 뤼시앙 콩벨은 15년형을 판결 받았다. 여러 신문에 친독기사를 쓴 기자 피에르 드리유 라 로셀의 경우 자신이 숙청당할 것을 예상,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즉, 프랑스 나치 부역 언론인들의 경우 다수가 제명에 죽지 못하고 2차 세계대전 종료 직후 재판을 거쳐 죗값을 치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반민특위 실패 이후 수십년 동안 친일파 언론인을 단죄하려는 시도가 없었고, 이에 따라 천수를 누린 친일파 언론인이 제법 있었다는 평가다.
황희진 기자 hhj@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