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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부부혁명가 김성숙과 두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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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16 18:20 조회9,0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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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17회] 무산계급과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는 공통된 이상은 두 사람을 하나로 연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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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두군혜는 김성숙과 상의하면서 일본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선진문물을 통해 여성해방의 이론과 중국혁명의 방향을 찾고자해서였다. 김성숙은 첫정이 잔뜩 든 연인이 일본으로 가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도 했으나, 제국주의 현장에서 배우는 것도 장래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믿었다.

두군혜는 1928년 초 긴 머리를 자른 뒤 많은 사회과학 서적을 짊어지고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 이르렀다. 중국공산당 도쿄특별지부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본의 중국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유학생들과 반일운동을 펴던 중 6월에 귀국하였다. 일본 체류기간은 3개월이 채 안 되지만 배운 것은 적지 않았다. 

 

귀국한 그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선전활동을 통해 국민당정부의 반혁명에 맞서 싸웠다. 김성숙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여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선전하고 국민당정부의 부패상을 여과없이 폭로하였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과학사전』과 『교육사』를 번역하기도 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그녀는 때로는 부득이 은밀한 방법을 통해 필명을 바꾸거나 익명으로 글들을 발표했다. 

 

아울러 일본 작가들이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기조하여 압축해서 쓴 보급판 『국가와 계급』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번역원고는 서점 주인이 가져가기도 하였는데 출판되지 않아도 돌려주지도 않고 아무런 답변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과 어려운 생활에 상관없이 두군혜는 끊임없이 글로써 투쟁을 이어나갔으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주석 6)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 정분이 쌓이면 결혼하는 것이 코스가 된다. 두 사람은 1929년 결혼하였다. 김성숙은 출가하기 전 소싯적에 1895년 생인 정(鄭)씨와 혼인을 한 것으로 전한다. 이 여성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당시 조선은 조혼풍습이어서 그도 부모에 떠밀려 조혼을 하고, 맘에 없는 여성과의 혼인이 출가의 한 계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 사이에 딸 숙녀(淑女)와 아들 정봉(鼎鳳)을 두었다.

1929년, 두군혜와 김성숙은 결혼하였다.

김성숙은 중국에서 떠돌아다니는 한국 혁명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 이 당시 중국여성이 도망자 신분의 외국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두군혜는 친구들과 지인들의 수군거림에 개의치 않았으며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이끌어 나갔다.

무산계급과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는 공통된 이상은 두 사람을 하나로 연결시켰다. 결혼할 때 두 사람은 서로만이 쓰는 이름을 하나씩 만들었다.

두군혜는 "징", 김성숙은 "절"로 철저하게 혁명을 위해 헌신한다는 의미였다. 상하이에서 우한, 충칭까지 두군혜와 김성숙 및 다른 한국 도망자들은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서로 도움을 나누었다. (주석 7)

주석
6> 앞의 책, 9쪽.
7>앞의 책, 9~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