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김원봉
김흥식 | 그림씨 | 1만4900원
일제가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던 독립운동가는 누구였을까. 백범 김구가 아니다. 바로 의열단을 이끌던 약산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로 내걸린 현상금이 당시 돈으로 100만 원이었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거의 34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게나 많은 돈을 현상금으로 걸었지만 김원봉은 일제에게 단 한 번도 붙잡힌 적이 없다. 그만큼 신출귀몰했다. 한 장소에서 2시간 이상 머무른 적이 없다고 전해질 정도로 전설적이기까지 하다.
김원봉의 삶은 일제강점기의 그것과 광복 후 사망 시점까지의 삶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동을 다룬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김원봉 삶의 핵심은 일제강점기 그의 활동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광복 후 사망까지의 사료 부실 또한 한 요인이 됐다.
김원봉은 나라를 되찾는 길은 오직 무장 투쟁이라고 생각해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는 의미로 의열단을 만들어 의백(단장)이 됐고, 의열단원들과 함께 일제의 주요 시설들을 폭파하고 주요 인물을 처단했다.
일제가 두려워할 정도로 의열단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일제와 맞섰지만, 광복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하고 최고위직에 올랐다는 이유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이나 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김원봉은 시민들에게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베일에 싸여 있거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김원봉은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등장해 시민들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드라마 ‘이몽’으로 안방에까지 들어와 조금씩 친숙해지고 있다.
항일독립지사 운암 김성숙은 김원봉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약산은 좋은 사람이요,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굉장히 좋아요. 혁명 지조가 있는 사람이고, 그러나 학식은 없다.” 또 그를 가리켜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
운암 김성숙의 말대로 의열단 단원들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지로 뛰어들었다.
1920년 10월 15일자 ‘매일신보’를 필두로 해서 1924년 5월 9일자 ‘매일신보’의 기사는 의열단이 행한 ‘밀양 폭탄 사건’을 낱낱이 보여 준다. 밀양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된 사실, 그 폭탄 투척이 김원봉이 의백으로 있는 의열단원들이 실행했다는 사실, 그 사실을 파헤쳐가는 과정, 의열단원들이 재판을 받는 과정까지 세세하게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저자는 대학교를 다닐 무렵 평생 우리말과 우리글을 기록하고 확장하는 출판에 종사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 후 출판 일에 진력하고 있다. 틈틈이 우리 역사와 글에 대한 책을 번역하거나 출간했다. 번역한 책 ‘징비록’은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전으로 자리 잡아 출판의 보람을 느끼고 있으며, 그 외에 ‘한글전쟁’,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 ‘광고로 보는 출판의 역사’,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기획)’, ‘원문으로 보는 친일파 명문장 67선’ 등 책을 짓고 꾸미는 일에도 관여했다.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