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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반혁명의 복벽주의와 마주치면서 혁명가로 성장한 두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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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15 16:37 조회9,3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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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16회] 두군혜는 김성숙을 만나면서 중국의 역사현실에 눈을 뜨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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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군혜 여사 두군혜 여사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중국에서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두군혜는 아버지가 과자점 점원인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공부습관을 길러 역사의 영웅들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노력하였다. 정의감도 남달랐다.

어린시절,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집 앞에서 혁명가들이 청나라의 군인들에게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가 그에게 말하였다.

"저 혁명가들은 다 훌륭한 분들이야.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사나이들이란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삼촌의 변발(길게 땋은 머리)을 잘라버리셨다. 훗날 그것이 바로 신해혁명이었고,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석 3) 


두군혜는 이국의 남성 김성숙에 매료되었다. 


그의 박학과 따뜻한 성품, 다양한 이념적 깊이에 경외감을 갖고, 망명생활로 지쳐가는 그의 메마른 정서에 사랑의 씨앗을 안겨주었다. 


중산대학교 기숙사에 가려면 전체 시내를 가로질러가야만 했다. 이 두 사람은 시내 주택가를 떠나 길에 들어서자마자 유혈이 낭자한 건널목을 걸었다. 이때 도로 양쪽에 쌓인 시체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서있는 인력거와 차 옆으로 봉기에 참여한 수많은 인력꾼들의 시체더미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참상이었다. 시체더미 가운데에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머리가 힘겹게 움직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두군혜는 큰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점심 때가 돼서야 두 사람은 중산대학교 기숙사에 도착하였고, 학우들을 피신시켰다. 두군혜는 광저우 봉기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봉기가 잔혹하게 진압되면서 그의 목격자가 되었다. (주석 4) 


중국혁명은 복잡한 양상을 띄면서 전개되었다. 청조 타도와 군벌등장, 국민당정부와 공산주의세력의 패권쟁투, 봉건유재와 공화주의사상 등이 종횡으로 얽히고 복합ㆍ상치되면서 혼돈과 혼란이 겹치고 있었다.

여성해방은 아직 선각적인 소수에 의해 제기될 뿐, 5ㆍ4운동의 언저리에 놓인 담론이었을 뿐이다. 사람은 고전적인 이론서보다 현실의 동태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두군혜도 다르지 않았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광저우 봉기라는 난리 속에서 이 하루를 보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혁명이 책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나도 생생한 살아있는 군중들의 투쟁이며, 혁명은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혁명의 복벽주의와 마주치면서 두군혜는 결코 겁을 먹고 포기한 것이 아닌 더욱 또렷하게 깨어났으며 혁명의 의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주석 5)

두군혜는 김성숙을 만나면서 중국의 역사현실에 눈을 뜨게 되고, 차츰 혁명가의 길을 택하기에 이르렀다.

주석
3> 앞의 책, 『여성운동이론 연구의 선구자 - 두군혜』, 4쪽.
4> 앞의 책, 7쪽.
5> 앞의 책, 7~8쪽.